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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에 남긴 발자욱

][ [북리뷰#18] 기계앵무새

날 짜 : 97/2/19
제목: <서평>기계앵무새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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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랑자 삶통해 '요새도시' 비판-
지피족을 아시는가? 여피족이나 미시족 처럼 첨단 생활방식을 상징하는 근
사한 紋章(문장)을 수여받은 족속들이 아니다.자정이 가까와 오면 하루밤의
잠자리를 구하러 지하철에 모여드는 사람들이 그들이다.물론 이 지피족은
우리 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세계 최강국인 미국에서부터 유럽 각지 그
리고 일본에 이르기까지 지피족이라 별칭되는 홈리스(homeless)들은 현대사
회의 ‘중요한’ 일원으로 세계 어디에나 존재한다.이르건대 현대사회의 탈
락자로 치는 부랑자가 바로 이런 존재일 터이다.
소설은 부랑자의 입담으로 하나 하나의 사연들을 포개 나간다. ‘나’와
모짤트라는 별호를 얻은 두 부랑자가 소설 전개의 기둥인물이다. 우선 이
소설이 우리에게 던지는 유다른 인상은 우리 소설 전통에서 제법 중요한 위
치를 차지하고 있던 인물 혹은 삶의 영역이 복원되고 있다는 점이다. 부랑
하는 삶이 그것이다. 간난과 피폐로 찌들어있던 우리 현대사는 원치 않더라
도 그런 부랑과 이산의 인생을 양산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에 대한 자연스
러운 반응으로 소설은 그런 사회상을 옮겨 놓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삶에 대한 소설적 묘사는 80년대 후반 이후, 특히 90년대 들
어 급격히 사라진다. 적어도 물질적 차원에서나마 먹고 살만해 진 사회적
재부는 그런 부랑적 삶을 어느 정도 지워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90
년대 초에 종래와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이 부랑적 인생을 끌어 올린 작품
이 있었던 바, 김소진의 ‘열린 사회의 적들’이 그것이다.
작가는 사회 통념에 배척당하고 동시에 억압받는 자의 정치를 도모한다는,
이른바 사회 양심세력으로부터도 은연중에 경원당하는 부랑자들(소설에서는
‘밥풀떼기’로 표현)을 등장시켜 그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바로 우리
사회의 어김없는 급소임을 갈파한 것이다. 그 후로 예의 인물과 삶에 대한
소설화는 또다시 사라진다. 바로 그런 소설 맥락의 망실을 복원하는 동시에
이즈막 우리 소설의 부챗살을 넓혀 가는 문맥에 이 소설에의 의미가 주어
진다.
‘나’의 눈에 포착되는 모짤트는 아주 기이한 존재이다. ‘나’와 같은 부
랑자이면서 통상적인 부랑의 형태와는 전혀 다른 생각과 삶을 사는 것이다.
의식주에 있어 세상 어디서나 흔하디 흔한, 이를테면 ‘더 질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무한 욕망의 법칙과 아주 무연하다는 것이다.
욕망의 포식만이 시민권 지급 자격이 되고 그것을 위해 일각이라도 바삐
움직여야 하는 현대 사회의 보편적 논리로 보아서는 그의 무욕과 여유는 별
경이 아닐 수 없는 터이다. 기실 체제의 관리자 위치에서 보면 부랑자는 체
제의 기능장애이자 채워야 할 구멍이다. 해서 근대 이전에는 생명 박탈로,
근대 이후는 푸코의 지적대로 배제보다는 훈육과 조절의 방식으로 그 구멍
을 채우고자 했다. 저 유명한 ‘형제 복지원’은 예의 훈육 혹은 관리의 전
형적 방식인 것이다. 복지원에 수용되는 까닭은 부랑자들이 근대적 또는 자
본주의적 인간이 아니라고 평결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체제 안
에서 생산적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 즉 잉여가치를 낳지 못하는 존재는 인
간이 아닌, 요컨대 ‘비인간’으로 분류되었던 것이다.
‘나’와 모짤트 역시 그런 점에서 ‘비인간’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그것
은 ‘나’의 생각일 따름이다. ‘나’와 모짤트는 외관적 유형은 부랑자라
도 속은 전혀 다른 존재이기에 그렇다. 먼저 ‘나’는 겉만 부랑자일 뿐 그
가 욕망하는 방식과 내용은 지배적인 형태를 그대로 좇는 존재이다. 때문에
부랑자는 마땅히 여사여사한 행색이어야 한다라는 지배적 통념과 ‘나’에
게 모짤트가 단연 기이한 자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셈이다.
커피와 음악을 즐기며 몸 가는대로 시간을 지배하는 그 기이한 부랑자 모
짤트의 여유는 그래서 또한 당연히 이상하게 보인다. 본질적으로 지배질서
의 통념에 순응하는 ‘나’에게 있어 ‘노동’(구걸의 시간)의 시간은 곧
자본주의적 욕망의 충족을 위한 바쁜 시간이지만 모짤트에게 그것은 자아의
몸을 자유롭게 보존, 활용하는 도락과 향유의 시간이기에 그렇다.
무상히 화랑 출입하는 모짤트와 그것을 가당찮은 짓으로 여기는 ‘나’의
차이도 유사한 맥락에 놓인다. 미국의 마이크 데이비스 같은 학자는 현대
도시가 마치 요새처럼 되어 간다면서, 그것을 ‘요새도시’라 개념짓기도
한다.이 요새도시는 중산층 이상, 그 도시의 지배자를 위해 방어와 멸균 시
스템을 구축한다. 부랑자나 각종 ‘비인간’을 특정지역으로 몰아 내는 거
리청소를 통해 현대도시의 바이러스(‘비인간’)를 박멸하고 동시에 자신들
의 빌딩, 집, 쇼핑몰, 각종 문화시설 들은 중세의 성과 같은 단단한 공간으
로 만들며 거기다 공공경찰, 사설경찰, 전자감시장치 등을 동원해 완강한
방어 ‘요새’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서울도 크게 다르지 않다.
화랑같은 문화시설을 접촉하게 되면 ‘나’는 스스로를 멸균의 대상으로
여기지만 모짤트는 간단히 그 요새의 성격을 비웃으며 한가롭기 그지없는
소요자가 되어 그 요새의 사이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것이다. 이쯤되면 우
리는 소설의 메시지를 궁굴려 볼 수 있는 유력한 단서를 얻는다. ‘나’의
시각으로 보면 모짤트는 분명 ‘비인간’이다.그가 비록 무욕의 존재로 간
주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단지 자본주의적 욕망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만 무
욕이지 모짤트 역시 욕망하기는 매 한가지이다. 하지만 그의 ‘비인간’적
욕망은 자본주의적 인간의 욕망과 지극히 대조되면서 그 정상적 ‘인간’이
내뿜는 욕망의 비루함을 통렬히 강타한다. 그런 점에서 정상적 인간들이
건설하는 배타적 ‘요새도시’에서 그의 ‘비인간’으로서의 존재론은 현대
사회의 윤리학을 새삼 환기 시키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의 많은 부분은 ‘나’의 상상으로 채워져 있다.그러나 정작 소설에서
주목되는 지점은 양으로는 얼마 안되지만 현재 시점에서 이루어지는 ‘나
’와 ‘모짤트’의 행적인 까닭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물론 구성, 주제의식
의 묘사 비율, 형상화 방식 등에 있어 소설은 만만찮은 문제점을 드러 낸다
.그에 대한 논의는 다른 지면을 요구한다. 하지만 ‘비인간’에 대한 작가
의 복권의식 만큼은 이 소설의 긴요한 성취임이 분명하다.
<이성욱 문학평론가> … 평자는 한신대학교 독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
으며 논문으로 ‘우리시대의 죄 혹은 죄의식-조세희론’과 저서로 ‘문화분
석의 몇가지 길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