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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에 남긴 발자욱

[북리뷰#8] 우연성,아이러니,연대성

번호 : 9/20 입력일 : 97/01/08 16:11:06 자료량 :93줄

제목 : <서평>우연성,아이러니,연대성
날짜 : 97년 01월 08일

오늘날 서양철학은 철학의 자기 규정의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이 탄생한 이후로 여러가지로 변신을 거듭해 왔으나 그 목
표를 영원하고 불변하는 진리의 탐구에 두었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플라톤은 그것을 존재의 세계에서 찾았고 데카르트는 자아의 인식에서 그
출발점을 삼았다. 현대 철학을 주도하고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에도 마
찬가지였다. 그는 비록 진리 탐구의 대상을 존재나 인식에서 의미의 영역으
로 옮겨 왔으나 완전한 확실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일관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철학이 과연 그러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지, 있다고 해도 그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철학자들이 많아
졌다. 데리다, 푸코, 료타르, 로티 등 이른바 포스트 모더니즘의 기수들이
바로 그러한 철학자들이다.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는 원래 언어 분석 철학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 그러나 듀이,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등의 영향을 받고 인식론 중심의
철학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여 철학관 그 자체를 바꾸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철학이 더 이상 진리 탐구의 허망한 작업에 진력할 것이 아니라 「인
류의 대화」를 시도하는 교화작업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기껏해야 자의식적인 문화비평에 종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는 것이다. 그 자신이 프린스턴 대학의 철학과를 떠나서 버지니아 대학의
인문학과로 옮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로티가 시도하는 철학관 개조 작업은 주로 세가지 방향에서 전개되는데 서
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로티는 형이상학적, 과학적 및 윤리적 실재론을 주장하는 입장에 대
하여 철저한 반론을 제기한다. 이것은 언어가 무엇인가를 지칭함으로써 의
미를 지니며 여기서 지칭되는 대상이 언어와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는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둘째, 로티는 철학의 새로운 모습을 과학이나 수학, 논리에서가 아니라 시
, 문학, 문예 비평 등에서 찾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철학이 다른 학문에 비
해서 우위에 있음을 부정하고 「백화가 만발하기」를 기대하며, 그것을 실
현하기 위해서 「진리성」「객관성」「합리성」등의 고정관념을 우선 폐기
한다.
마지막으로 로티는 자유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그것이 관용의 원리
를 수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구 문화가 창출한 최선의 세계에서 시적
은유의 충동이 고무되어 왔음을 환기시킨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른바
다원적이고 「탈근대적인 부르주아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것이다. 이번에
우리말로 번역되어 출간된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은 이중에서 주로
세번째 접근방식에 관한 집중적인 논의가 담겨 있다.
로티가 서문에서 지적하듯이 이 책에서 그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통합하는 이론에 대한 요구를 떨쳐버리면 사물들이 어떻게 보일 것인가」를
밝히고자 애쓰고 있으며, 또한 「자아창조의 요구와 인간 연대성의 요구는
똑같이 타당하지만 영원히 공약 불가한 것」으로 취급한다. 이러한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제시하는 독특한 인간상 즉 「자유주의 아이러니
스트」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로티에 의하면 「자유주의자」란 무엇보다 잔인성을 가장 혐오하는 인물이
며,「아이러니스트」란 자신의 가장 핵심적인 신념과 욕구들이 우연성을 지
니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따라서 그것이 시간과 기회를 넘어
선다는 생각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역사주의적이며 명목론자인 사람을 의
미한다. 그러한 사람은 비교적 낙관주의적인 면모를 나타내게 마련이어서
고통이 장차 감소될 뿐만 아니라 결국 다른 인간에게 굴욕당하는 일이 없게
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현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유형의 휴머니스트로서
진리나 객관성 혹은 합리성 따위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신축성 있
게 자신이 직면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함으로써 인간성을 극대화하는 인물이
라고 할 수 있다. 로티가 영원하고 불변하는 진리의 탐구를 철학의 전유물
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이유가 이제 분명해졌다. 그러한 태도는 폐쇄적인 전
체주의를 옹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리와 정의의 미명 아래서 잔인성과
독선을 정당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로티는 자신의 고유한 사회철학을 발전시키고 그것을 체계화하기 위해서
주로 고전적 실용주의를 완성시킨 듀이의 사상에 의존하다. 그러나 그는 듀
이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인간의 실존적 상황이나 개인적 불안의 문제에
과감하게 돌입하는데, 여기서 그가 방법론으로 채택하는 것은 연역적 논증
이나 귀납적 정당화가 아니라 「우회」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
문예비평」의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에서는 논리의 엄밀성과 증거의 객관성 같은 것은 오히려 속임
수의 일종으로 나타나며 독단과 폐쇄성의 도구로 이해된다. 따라서 「텍스
트가 전부」라는 데리다의 주장이 자연스럽게 수용되고 전통적인 철학적 논
제들도 문예 텍스트의 일종으로 재해석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
에서 자연스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를 오독함으로써 파생되는 참
신한 「메타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로티가 이 책의 상당한 부분을 데이비드슨, 프로이트, 프루스트, 데리다,
나보코프, 오웰 등에 대한 문예비평으로 구성하고 있는 이유를 우리는 충분
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역자들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로티 자신의 실용주의 사상 내에서도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저서이며, 철학이나 문예비평에서도 획기적인 시도라고 보아야 할 것
이다.
로티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은 전통적으로 서양 철학이 강조하고
또 추구해온 형이상학적 필연성 대신에 역사적 우연성을, 인식론적 논증성
대신에 문예비평적 풍자성을,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규정하는 합리적 보편
성 대신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인류의 연대성을 강조하는 메타 철학적 명
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할 수 없는 상대주의의 도입이다. 특히 철학자로서 이
러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퍼트남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정신적 자살행
위」에 해당할 수도 있다.
물론 로티 자신은 통상적 의미의 절대주의자나 상대주의자가 아니라고 주
장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논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은 설득력에 한계
를 지닌다. 결국 현대철학이 어떻게 그 정체성 위기를 극복하는지 가늠하기
위해서 우리는 좀 더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
엄정식<서강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