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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에 남긴 발자욱

[북리뷰#5/해외] 크렘린의 수령들


제목 : <서평>드미트리 볼코고노프의 '크렘린의 수령들'
날짜 : 97년 01월 15일

미트리 볼코고노프의 유작인 ‘크렘린의 수령들’이 번역 출판된 것은
옛 소련의 정치사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게되었다는 점
만으로도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다. 이 책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는 먼저 저자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해 그는 소련의 권력사에 관해 객관적 안목에서 서술한 뛰어난
역사학자였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역사학 박사로서, 소련의 권위있는 전사
연구소 소장을 지냈으며, 무려 30여권의 책을 썼다는 경력만으로 그렇게 평
가받는 것이 아니다.
소련 공산당의 공식적 해석보다도 진실을 더욱 존중한 역사학자로서의 자
세가 그를 돋보이게 만든 것이다.
그는 소련의 역사학자로서는 드물게 자유민주주의에 눈뜬 학자였다. 육군
탱크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군인으로서의 외길을 걸어 육군대장에 올랐다는
경력만 보면 그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던 것처럼 느껴지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공산주의 규율이 가장 엄격히 요청되는 군생활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적
사고에 접하기 시작했고, 자유민주주의적 사관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에게 레닌시대로부터 고르바초프시대에 이르는 70여년의 소련권
력사는 비판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그가 쓴 책들이 소련 당국으
로부터 소련의 역사를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리하여 마침
내 전사연구소 소장직에서 해임되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논리의
귀결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우리는 독재체제를 미워하는 그의 자유민주주의적 역사인식을
확인하게 된다. 소련에서 최고 권력에 올랐던 7인, 곧 레닌 스탈린 흐루시
초프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고르바초프를 다룬 이 책을 통해 우
리는 소련의 정치체제가 얼마나 독선적이고 위선적이며 반국민적이고 반인
간적이었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어떤 이념을 설교하는 책은 아니다. 이 책은 저자
만이 접할 수 있었던 귀중한 비밀자료들이나 1차 사료들을 충분히 활용하여
소련의 이면사와 함께 7명의 소련 권력자들을 재조명하고 있기에 우리가
지난날 잘 몰랐던 많은 새로운 정보들을 대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훌륭한
역사책이다. 역사를 비평하는 그의 자세가 다소 편견에 치우친 것이 아닌가
하는 일각의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은 소련 정치사에 관한 소
중한 연구업적이라는 칭찬을 받기에 손색이 없는 것이라 하겠다.
이 책은 지금까지 감추어져 왔던 여러가지 사실들을 공개하고 있다. 철저
한 금욕주의자로 위장하면서도 아르망이라는 미모의 정부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나, 혁명을 전후하여 불투명했던 그의 행적은 레닌의 위선자적 측면
을 보여준다. 국가보안위원회(KGB) 의장 출신의 안드로포프가 철저한 당료
출신의 체르넨코를 제치고 브레즈네프의 후계자로 뛰어 오르는 과정이나 고
르바초프가 지역당 제1서기로부터 중앙당 서기로 뛰어오르는 과정역시 자세
하고 재미있게 서술되어 있다.
우리나라와 관련된 얘기들도 적지않다. 그 가운데 우리의 관심을 가장 많
이 끄는 것은 역시 6.25 한국전쟁 비화라고 하겠다. 특히 스탈린이 3차대전
의 발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서 모택동에게 한국전 참전을 설득하는 대목
은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계속 연구를 해야할 부분이다.
1983년 KAL기 격추사건 당시, 크렘린이 사할린 해역에서 블랙박스를 건져
내고도 ‘숨길 수 있는 것은 비밀로 한다’는 원칙에 따라 이 사실을 감췄
다는 얘기도 흥미롭다.
북한과 소련사이의 몇가지 갈등관계도 의미있게 보게된다. 특히 김일성이
소련을 방문하여 고르바초프에게 서울올림픽 거부를 설득하지만 실패했다는
대목은 공식문서로는 처음 확인됐다는 점에서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며, 체르넨코가 김정일에게 소련방문을 제의했었다는 사실도 새롭다. 1984
년에 이미 소련이 김정일의 권력 승계가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
음을 시사해주는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과거 국내에서 출판된 러시아나 소련관계 서적의 거의 대부분이 중역(重譯
)된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 책이 러시아역사를 전공하는 6명의 소장학자들
의 손으로 번역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러시아어 원전이 본격적으로 러시아어
를 해독하고 있는 러시아 전공자들의 손으로 번역 출판되는 시대를 열었다
는 측면에서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우리가 역사를 다시 읽는 중요한 이유가운데 하나는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
기 위해서이다. 잘 번역된 이 책을 통해 소련의 역사를 다시 읽음으로써 소
련이 어떻게 성립됐고 유지됐으며, 결과적으로 어떻게 쇠퇴했고 붕괴했는가
를 생각하는 가운데 북한의 오늘날을, 그리고 우리의 현실을 냉철히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金學俊 <인천대 총장·정치학:평자는 美 피츠버그대 정치학박사이며, 러시
아 소련관련 저서로는 ‘러시아혁명사’ ‘소련정치론’ ‘소련외교론’등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