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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에 남긴 발자욱

[북리뷰#3] 학술연구에서 글쓰기의 혁신은


제목 : <서평>학술연구에서 글쓰기의 혁신은 가능한가?
날짜 : 97년 01월 22일

“연구자가 글쓰기를 할 때 ‘이 땅’의 의미란 무엇일까.’이 역사’의
의미란 무엇일까.”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낯선,아니 정확하게는,구체적이므
로 낯선 제목을 단 이 책은 이런 물음을 화두처럼 던지며 시작한다.사실 이
물음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남의 역사와 터에서 형성된 문제의식을 맹목적
으로 수입해서 ‘포장된’계몽을 퍼붓는 것으로 지식인의 역할을 삼았던 파
행의 와중에서도 우리 역사와 땅의 뜻을 새기려는 학인들은 있었다.그러나
부산대학의 김정근 교수와 그의 박사과정 제자들이 쓴 ‘학술연구에서 글쓰
기의 혁신은 가능한가’는 이 화두를 특별히 ‘글쓰기’라는 층위에서 풀어
내는 작업이어서 색다른 맛과 의의가 있다.
이 책을 일관하는 문제의식은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땅에서 나온 것이다.그
리고 그것은 아픈 역사와 아픈 땅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김 교수가 이미
앞서 출간한 ‘한국의 대학도서관 무엇이 문제인가’(한울.1996)에서 지적
했듯이,이 아픈 문제의식의 출처는 “한국적인 현장은 처연하게 땅 위에 누
워 있는데 강단의 언어와 처방은 외국으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는 비판과
탄식에 있다.이 탄식은 먼저 앎의 근원적 권리원천이 삶에 있다는 자각에서
출발한다.
사실 이것은 앎과 삶 사이의 경계가 잉태하는 끝없는 긴장을 견디면서 둘
사이의 소통에 최선을 다하려는 학인의 기초적 소명에 다름 아니다.바로 이
앎의 권리원천과 학인의 기초적 소명이 망각되고 왜곡되는 데에서부터 이
들의 문제의식은 출발하는 것이다. 이 책은 글쓰기의 혁신이라는 과제를 통
해서 이 문제를 해명하고 해결하려는 모색이다.여기서 다루는 글쓰기의 혁
신이라는 테제도 결국은 우리 정신사의 질곡으로 남아있는 앎과 삶 사이의
벽을 허물려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그리고 그 사이를 통풍시켜 학문의 주
체성과 자생성을 길러나가려는 구체적인 전략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노력은 단순히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라 줏대와 창의,결기와
실존,自尊(자존)과 自存(자존)의 문제다.이 책의 저자들이 “식민성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글쓰기부터 혁신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도 마찬가지 이
유에서다.
이 책의 저자들은 ‘우리의 현실에 복무하는 글쓰기’를 모색하는 과정이
내가 제안한 ‘잡스러운 글쓰기’의 정신에 일부 빚지고 있음을 밝히면서,
책의 2부에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문헌정보학에서 새로운 글쓰기의
사례를 나름대로 선뵈고 있다. 잡스러운 글쓰기란 한편 김 교수의 표현처럼
“현장의 질곡을 개선하고 이끌어 가기에는 강단의 언어가 너무 무력하기
에 일상언어가 가지는 역동성을 탄력적으로 선택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원전과 논문의 땅을 바라보느라고 우리 이웃을 체계적
으로 무시해온 학문이 역사에 대한 전략적인 반성이기도 한 것이다.요컨대
이 책의 저자들은 글쓰기의 혁신을 통해서 실사구시와 탈식민성이라는 이중
의 타깃을 노리고 있는 셈이다.그러니 이 책의 결의란 참으로 야무지지 않
겠는가.
우리는 그간 정신문화의 주체성과 자생성을 보육할 수 있는 기회를 번번이
놓치고 말았다.뉘우침이란 싹을 나게하는 거름과 같다는 다산의 말처럼,과
거를 뉘우쳐 온고지신의 지혜를 얻는 것은 우리 학인들의 당연한 소임일 것
이다.다소 과람한 상상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이 책은 우리 근대사가 반복
해서 저지른 실수를 뉘우쳐 반성하고,그 교훈을 오늘에 되새기는 역사적 작
업의 일단이라고 여겨도 좋을 듯하다.
가령 소현세자의 죽음이나 정조의 개혁이 실패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小中
華(소중화)콤플렉스를 벗어나 우리 학문의 새로운 가능성을 눈부시게 드러
낸 17세기 이후 실학의 성과가 법고창신의 학맥을 타지 못한 것은 너무나
아쉽다.개항 이후에도 안으로는 봉건왕조를 근대 민족국가로 탈바꿈시키는
데 실패했고,밖으로는 외세의 침탈로 인해 민족의 주체적 자존이 송두리째
훼실되고 말았다.해방 이후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타율과 상처의 역사
였던 우리의 근대,그 아픔 속에서 우리의 정신사적 전통은 절맥되었고,우리
의 터가 삭히고 우리의 역사가 묵힌 이치들을 창의적으로 계승하지 못한 그
텅 빈 자리에 허위의식만을 조장할 무수한 외래품들만이 여전히 거품처럼
범람하고 있었던 것이다.사상에서의 절맥이란 치명적이다.사상사엔 猝富(졸
부)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한 권의 책으로 이미 엎질러진 우리 정신문화사를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다.그러나 이 결의를 출발점으로 삼아 우리 학문의 미래를 함께 고민할
수 있지는 않겠는가.
金永敏<한일신학대 교수·철학>
… 평자는 미 드루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박사논문으로 ‘현상
학적으로 본 시간론’이 있으며 저서로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
’(민음사)’컨텍스트로 패턴으로’(문학과지성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