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종이매체의 위상
책은 오랜 세월동안 인류의 지식을 담아온 용기이며, 인류의 지식 확산에 기여
해온 매체이다. 고대사회에서 책을 만든다는 것은 주술적이고 신비적인 성격을 지
니고 있었다. 중세 유럽사회에서는 전체 인구의 90%가 문맹자였고 그 당시 지배계
급에 속한 성직자의 반이 글을 읽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회에 양피지에 새
겨진 문자를 해독하는 것은 신통력을 지닌 자로 생각되었다.
책을 만드는 재료는 죽간, 목독, 견백, 점토판, 양피지 등을 거쳐 종이에 이르게
된다. 종이를 만드는 기술은 중국에서 AD 105년에 발명하게 되며, 그 이후 제지
술은 동쪽 방향과 서쪽방향으로 긴 여행을 떠나게 된다. 동쪽으로 여행을 출발한
제지술은 AD 593년 고구려 영양왕때 우리나라에 전래되었고, AD 610년 고구려
승려 담징에 의해 일본으로 전래된다. 서쪽으로 여행을 떠난 제지술은 AD 757년
Samarkand, AD 793년에 Baghdad, AD 1150년에 스페인에 전파되고, 그 이후 유
럽전역에 확산하게 된다.(주: 김세익, 도서 인쇄 도서관사, (서울 : 종로서적, 1982
),
pp. 39∼57)
동양에서 발명한 종이 만드는 기술이 유럽사회에 보급된 것과 아울러 구텐베르
그의 금속활자 인쇄술 발명은 암흑기에 있는 유럽사회를 계몽의 아침으로 내몰았
다. 당시 유럽사회에 종이의 영향력이 어떠했는지 들여다보자.
유럽을 소생시킬 수 있었던 최대의 은인은 동양에서 건너온 종이였다. 세계 도
처에 성서가 헤아릴 수 없이 넘쳤다. 학교용의 책이 헐값이 되고 독서기술이 날로
보급되었다. 문자가 분명히 인쇄되었음으로 하여 판독에 머리를 쓸 필요도 없고
읽으면서 곧 이해하고 생각할 수 있었다. 각국의 잡다한 지방적방언이 순식간에
표준 이탈리아어, 표준 영어 등등으로 변하였다. 그리하여 15세기와 더불어 유럽
문학의 진정한 역사가 시작된다.(주:이광주, "구텐베르크전후와 인문주의자들의 등
장 : 서적의 사회학", 현대문학, 1985. 4. p. 99.)
구텐베르그 이후 1세기가 지난 16세기말 프랑스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서명할 수
있는 부부가 13%에 불과하였으며, 2세기 후인 17세기말에도 21%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주: 앞의 글, p. 105.)
그 이후 지식의 대중화 현상에 힘입어 종이매체는 인류의 삶 자체라고 부를
만큼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의 광풍이 몰아닥친 이 땅에는 종이매체
와 종이도서관이 사라질 것이라고 얘기들을 하고 있다. 종이매체는 그 역할을 다
하고 이제 최후의 운명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가. 이와 관련된 학계의 주장 하나
를 살펴보자.
지금 서구에서 급속한 속도로 진행중인 도서관 환골탈태의 특징은 세 가지로 요
약 가능한데 첫째, 도서관에서 책이 사라지고 있다. 둘째, 이용자가 굳이 도서관
에 갈 필요가 없어지고 있다. 셋째, 지구촌 어느 곳에 있는 도서관이든 이용할 수
있게 되가고 있다는 것이다. 즉 단적으로 말해 종래의 도서관이 변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며 그 새로운 도서관이 전자도서관이다. (주:백항기, "대학도서관의
전자도서관화 방안", 한국문헌정보학회학술발표논집, 제2집(1995. 10), p. 115.)
위의 글은 종이매체 중심의 전통적 도서관은 사라지고 전자매체 중심의 전자도
서관(=디지털도서관)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종이매체가 사라
지고 있는 현상은 없으며, 오히려 각종 통계에서는 그 사용량이 증가하고 있다.
전자매체도 나름대로 장점을 지니고 있어 그 생산량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현재 간행되는 종이매체 중에서 전자매체로 대체해서 이용하는 것
이 편리한 분야도 있다. 그러면 어떤 분야가 전자매체 사용이 편리한 분야인지
살펴보자. 이는 종이매체가 수행하는 기능을 살펴봄으로서 예측이 가능하다.
종이매체는 3가지 기능이 병합되어져 있다. (주: 井上 如, "紙と トキュメンテ-
ション : 印刷物の 將來 再考", 情報の 科學と 技術, 제46권 2호 (1996), p. 70.)
첫째 기능은 아카이브(archive) 기능이다.
이는 종이에 기록된 문자열이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고, 시간이 경과해도 보존
되는 기능을 말한다. 두 번째 기능은 정보전달기능이다. 정보전달에는 사람과 사
람과의 정보전달과 매체와 사람과의 전달이 있다. 셋째 기능은 정보처리기능이다.
책의 기능성을 강조하는 미래주의자들은 위의 3가지 기능을 수행하는데 전자매
체가정보의 기록성, 전달성, 신속성, 가공성에서 뛰어나므로 종이매체 보다 우수
하다고 말한다. 전자매체는 기능성에서는 종이매체보다 우수하다. 따라서 기능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비행 스케줄, 주식가격, 현금변동률과 같은 가변적이고 즉흥적인
분야의 자료나, 긴 문헌에서 특별한 말이나 구를 탐색할 때나, 멀리 있는 자료의
가벼운 이용, 빠른 통신이 요구되는 문헌의 전달을 하는데는 종이매체보다 편리하
다고 한다. (주: Buckland, op. cit., p. 45.)
종이매체도 이들 3가지 기능을 수행하는데 우수한 점이 많이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첫 번째 기능인 아카이브의 기능을 살펴보자. 전자매체가 항구적인 기록보
관용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전자매체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항구적인 기록보관용
으로 적합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과거 천공카드에 의한 기록류들은
지금 사용되고 있지 않으며, 지금 사용하는 플로피 디스크와 CD-ROM은 50년 뒤
에는 지금과 같이 사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 경험에서 짐작 할 수 있듯이 지
금 전자매체 속에 기록되고 있는 컴퓨터 언어와 구조들은 몇 년을 지속하다가 새
로운 기술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이런 매체들이 바뀔 때마다 모든 자료들을 새
로이 복제하여 관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종이매체가
먼저 나왔다. 통신망을 통하여 접근을 할 수 있는 자료들은 주로 근래에 간행된
자료들이다. 과거자료 보존을 위하여 모든 자료를 전자화할 수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 (주: Clifford Stoll, 한경훈 역, 허풍떠는 인터넷, (서울 : 세종서
적,
1996), pp. 261∼265.)
종이매체의 아카이브 기능 중에서 각종 결재서류는 전자매체로 대체될 것이다.
이는 서류위에 실린 기호가 일의 성취를 목적으로 하는 '일-기호'로 되어 있어
종이매체에 실린 '생각-기호'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종이 매체에 실린
기호는 저자의 생각에서 태어나서 독자로 하여금 사고를 하게 하는 미완성의 기
호이며, 수신자의 참여 정도에 따라 그 전달성의 성취도가 가늠되는 즉 생각을
전제로 한 기호를 수록한 것이다.
일반 회사에서 사용되는 종이매체에 기록된 서류가 전자매체로 대체되는 것을
보고 종이가 사라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분을 보고 전체를 말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는 서류도 종이이고 종이책도 종이로 되어 있으니, 서류가 사라지면 종이
책도 따라서 사라진다는 억지 논리로, 나막신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구두도 신이
니 사라질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과 같다 (주: 정병규, "새로운 책의 발견의 시대
를 위하여 : 오늘의 책의 문화는 왜 종이에 주목하는가", 비블리오필리, 제6호
(1995, 겨울호), p. 37.)
두 번째 기능인 정보전달기능에 대하여 살펴보자. 사람과 사람간의 정보전달기
능은 전자매체가 뛰어나다. 사람과 매체와의 정보전달도 작은 단위로 이용되거나
신속성이 강조되는 정보위주의 책들은 전자매체가 뛰어나다. 이에 해당하는 자료
는 사전, 색인, 관보, 연감류, 각종 통계자료들로, 이들은 인류의 '생각-기호'를 수
록한 책들과는 출발점부터 종류가 다른 책들이다.
사람과 매체와의 정보전달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자. 종이매채 이용자는 기계가
아니고 인간이다. 인간이 정보와 지식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지에 대한 이해를 통
하여 종이매체가 정보전달기능에서 우수한 부분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정보와 지식을 받아들이는 도구로 5관을 활용한다. 즉, 눈을 통하
여 시각정보, 귀를 통하여 청각정보, 코를 통하여 후각정보, 입을 통하여 미각정보,
피부를 통하여 촉각정보를 받아들인다. 이들 수신기관들 중에는 정보와 지식을 받
아들이는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도구가 눈과 귀이다. 주로 눈을 통하여는
browsing과 reading을 하고, 귀를 통하여는 hearing을 한다. browsing을 하는데는
전자매체가, reading을 하는데는 인쇄매체가, hearing을 하는데는 전파매체가 우수
하다.
따라서 전자매체는 browsing을 통하여 가변적이고 즉흥적인 정보를 인간에게
전달하는데는 뛰어나지만 지식, 이해, 지혜를 구하는데는 종이매체에 수록된 정보
와 지식을 reading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모르티머 애들러(Mortimer Adler)가 말한 '마음의 네 가지 자산'을 이해하면 종
이매체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인간에게 지식과 이해, 지혜를 주는 주요한 정보
전달 매체로 사용될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마음의 네 가지 자산으로 정보, 지식, 이해, 지혜를 들고 있다. 이 네 가지
가운데 정보 는 가장 값이 떨어지며 지혜 쪽으로 갈수록 보다 큰 가치를 가진다
고 설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정보는 사람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그것들에
는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의 마음이 게재 되어 있지 않기에 전자기술을 이용한 처
리나 전달에 알맞다고 한다. 지식은 의미로 바뀐 정보라고 하다. 그것은 기록되
고 전달될 수 있지만, 컴퓨터는 그러한 전달에 있어 바람직한 매체가 결코 아니
라고 한다. 이해는 어떤 세계관과 개인적 관점이 반영된 지식을 말하며 전적으
로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혜는 이해가 완전하고 생산적으로
된 상태를 말하며 역시 인간정신에 의해서 만 구현된다. 컴퓨터는 지식의 전달에
서와 마찬가지로 이해와 지혜의 전달에서도 결코 최선의 매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 사람들은 컴퓨터에 집착함으로써 정보의 홍수 속을 멋있게 수영할 수 있게 되
었지만 지식, 이해, 지혜를 구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바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책의 몫이며 도서관의 몫이 아니겠는가? (주: 김정
근, "그래도 변함없는 책과 도서관의 몫", 월간 서울, 1996. 10. p. 30.에 풀어 소
개
된 Mortimer Adler의 사상을 재인용함.)
세 번째 기능은 정보처리 기능인데, 정보처리 기능은 전자매체 만큼 우수한 것
이 나타나고 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전자매체의 우수한 정보처리 기능은 원문 내
용의 변경과 첨삭이 용이해 원형보존을 어렵게 하고 있다. 과거 창호지에 일필휘
지를 하던 시절에는 글이 종이 위에 그려지면 지우기란 불가능하였다. 사려 깊
게 쓴 글들은 자신의 정신의 족적으로 남아 원형으로 보존되었다. 오늘날은 컴퓨
터를 이용하여 다양하게 원문 변형이 가능하고, 이에 영향을 받아 사회 분위기도
유사품과 사이비가 활개치는 환경으로 바뀌고 있다.
미래주의자들은 종이매체가 수행하는 위의 3가지 기능적인 면을 보고 종이매
체가 수행하고 있는 기능은 전자매체로 대체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인
류는 기능적인 편리함 때문에 삶의 패턴을 바꾸지 않고 있다. 패션 분야를 예를
들어보면, 기능성이 강조된 기성복도 있고, 개성이 강조된 맞춤복, 또는 실험성이
강조돼 미래의 패션을 리드하는 디자인 작품 모두 공존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
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종이매체가 계속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어보
자.
첫째, 접촉적 질감의 문제로 살아 남는 다는 것이다. 이는 종이책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고는 열리지 않는 견고하게 닫힌 문과도 같은 엄폐성을 가진 존재이므로
인간의 손과의 떠날 수 없는 관계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종이책이 인간과의
접촉성 때문에 존재할 것이라는 정병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독자와 책사이엔 손을 통한 촉감이 존재한다. 눈으로 읽는 동시에 손으로 책을
만지고 접 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읽고 본다는 행위는 가장 인간적
인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다른 뉴미디어들은 전기라는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책
을 읽기 위해서는 인간은 스스로의 노동을 통한 에너지를 직접 투여 해야만이 손
과 잉크 묻은 종이와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루어진 만남
이라야 우리는 책이 가진 잠재력을 무한히 체험할 수 있다. 이렇듯 사람의 손길
이 닿는 순간순간 우리가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활자매체가 생명력을 띠
는 책의 매력, 이러한 감, 이러한 맛, '책맛'이다. 책은 우리에게 늘 인간적이기를
요구한다. 책은 언제 어디서나 두손으로 소유할 수 있는 친근한 형태 로 존재하면
서 따뜻한 매체로서의 체온이 숨겨져 있다. 광물성의 차가운 느낌을 가진 컴퓨터
나 텔레 비전에는 체온이 없지 않은가. (주: 정병규, 앞의 글, pp. 40∼41.)
둘째, 시각적 질감으로 인해 종이책은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책은 두께를 가진
입체성의 존재라는 데서 전자매체와 구별된다. 책의 두께는 눈에 보이는 외형적
부피로 인간정신의 깊이에 대한 상징이자 그 정신의 밝기를 유지하는 빛의 원천에
대한 상징이다. 전자매체에도 이들 내용은 담을 수 있겠지만 종이책에 담고 있는
두께는 인류문명의 깊이와 비례하기 때문에 살아남는 다는 것이다.
셋째, 종이책은 역사성을 갖고 있어 존재한다는 것이다. 종이책의 부피와 두께는
전자책의 0과 1의 단순조합을 넘어 무한한 가능성을 꿈꾸게 한다. 동시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모두 그곳에 존재한다. 이것이 종이책이 갖고 있는 역사성
이다. 책은 인류가 만든 유일한 영속물로서 국가가 사라지고 새로운 민족들이 다
른 문명을 세우더라도 여전히 인류가 새롭게 살 수 있는 것은 책의 역사성 때문이
라는 것이다. (주:박종암, "종이책은 과연 사라질 것인가?", 비블리오필리, 제6호
(1996, 겨울호), pp. 44∼45.)
지금까지 종이매체의 위상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우리의 미래도서관은 건물과
장서가 없는 도서관이 아니라 튼튼한 실물장서의 바탕 위에 전자적 접근을 통하여
이용자의 요구를 만족시켜주는 도서관이어야 한다. 우리가 가꾸어 나가야 할 미
래도서관의 모형은 이 땅에 사서직이 독립된 직업군으로서 튼튼히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모형인 공간으로서의 도서관이어야 한다. 우리가 가꾸어 나가야 할 미래
도서관의 모형에 대해 생각해 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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