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강연은 1996년 11월 25일 부산 동아대학교에서 있었던
학술강연회에서 발표된 부산대 김정근 교수님의 강연내용입니다.
3번에 나누어 게시합니다.
자료는 동아대학교 도서관 김현철 님이 제공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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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물장서, 아직도 중요한가?
김 정 근
부산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
I. 글을 시작하며
이번 행사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는 전화를 받은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아마도 지난 8월 언제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필자는 그 때 마
음에 와 닿는 부분이 있어 별다른 주저함이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동의를
하였다. 우선 11월에 있을 행사준비를 8월부터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
는 그 때 바쁠 것이다. 그래서 못한다.'라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사람에
게는 염치가 있는 법. 아무리 필자와 같이 세상물정 모르고 살아가는 터이
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점 동아대학교 도서관측의 준비성에 대하여 다
시 한 번 경의를 표하고 싶다. 다음으로는 이 모임의 중요성과 관련된 부분
이었다. 이 모임이 마이클 고어먼관장(Dean Michael Gorman)을 중심으로
준비되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 필자는 순간적으로 저으기 놀랐다. '세
상에 이런 다행한 일이 있을 수 있다니!'하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의 발
언이 우리 학계와 관계에 미칠 긍정적 영향과 파장을 생각하니 흥분이 되
어 오기도 하였다. 당연히 필자의 참여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 뒤 이 번
행사가 동아대학교 도서관 단독주최에서 한국도서관 정보학회와의 공동주
최로 조정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분이 가지고 올 메시지의 무
게에 비추어 참으로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학회
측의 안목과 기민성 또한 필자를 놀라게 하였다. 고어먼 관장의 메시지는
우리의 도서관 현장 뿐 아니라 학계가 함께 부딪쳐 있는 중대 관심사안이
라고 할 수 있는 미래도서관 담론에 대하여 적절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
할 것이라고 필자 나름으로 단단히 믿고 있었다.
실은 마이클 고어먼이란 이름은 그전에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이름이
기는 하지만 특히 최근 1년간 월트 크로포드(Walt Crawford)란 이름과 함
께 필자에게는 매우 친숙하고 소중한 이름이 되어 있다. 그것은 두 사람이
함께 쓴 미래도서관 : 환상인가, 광기인가, 현실인가 (Future Libraries :
Dreams, Madness, and Reality. Chicago : ALA, 1995)를 통해서이다. 필
자는 작년이래 이 책을 부산대학교 대학원 문헌정보학과의 여러 세미나 코
스에 소개해 두고 있다. 거기에서 지금 우리의 도서관계와 학계의 거의 모
든 영역을 무차별적으로 강타하고 있는 기술광신주의에 대한 대처방안을
젊은 연구자들과 더불어 논의하면서 이 책을 하나의 안목으로서, 지혜로서
활용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생산된 것들이 (글이 서툴러 여기서 소개하기
가 부끄럽긴 하지만) 다음의 논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근 이용재. "참
을 수 없는 '미래도서관 담론'의 가벼움" 圖書館文化, 제37권 4호 (1996. 7
8); 김정근 김종성. "계몽의 아침에 꾸는 악몽 : 도서관의 미래에 한국문헌
정보학은 희망인가?". 도서관, 제51권 3호 (1996. 가을); 김정근 김영기. "다
시 '미래도서관 담론'과 관련하여" 圖書館文化, 제37권 5호 (1996. 9 10)
앞으로도 이 계통의 글들이 몇 편 더 발표될 예정으로 있다. 필자와 필자의
공동작업자들은 이 글들에서 고어먼 관장을 여러번 인용하고 있다. 차라리
'맹렬하게 인용했다'고 표현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그만큼 그의 글은 강
렬함을 띠고 있었고 우리의 현실에서 아쉽고도 절실한 곳을 때려주고 있었
다.
오늘로부터 약 2주전 주최측으로부터 발표할 글의 제목을 요청받았다.
그 때 하루를 생각한 끝에 제시한 것이 "실물장서, 아직도 중요한가?"였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하여 오늘 우리 도서관계와 학계 위를 자욱하게 내려와
뒤덮고 있는 장서허무주의, 도서관허무주의의 정체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벽 있는 도서관, 종이책, 그리고 사서직의 불멸성에 대해 말해 보고
싶었다. 기술광신주의의 한국적 변용과 그 폐해에 대하여 토론해 보고 싶
었다. 내용을 이렇게 잡는 것이 필자가 책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고어먼
관장의 특별강연 내용과도 일맥이 통하여 조화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
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던 중 오늘로부터 일주일전 고어먼 관장의 강연
내용을 주최측으로부터 전달받아 읽게 되었다. 읽고난 후 필자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다. 거기에는 권위와 자신에 차 있는, 그리고 책임있
는 이 시대의 한 도서관인이 버티고 서 있었다. 짐작했던 대로 고어먼 관장
은 그의 글속에 지금 이 땅의 현실에 너무도 적합하고 유익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는 도서관인의 꿈은 결코 '기술광신주의'로 풀 수 없으며 냉정한
'현실주의'로써 실현할 수밖에 없음을 힘찬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는
넓은 시각에서 기술광신주의 광풍의 성격을 분석하면서 이것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서 전통의 대치(replacement)가 아닌 그것에의 추가(addition)와 보
강(reinforcement)이라고 하는 원칙론적 입장을 제시하고 있었다. 필자가
"실물장서, 아직도 중요한가?"라는 제목 밑에 담고자 했던 이 땅의 이야기
가 고어먼 관장의 원칙론에 완전히 일치해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이번
행사의 조화로운 분위기를 위하여 저으기 안심이 되기도 하였다.
II. 글을 펼치며
지금 우리 도서관계와 학계에서 세차게 일고 있는 디지털 라이브러리
바람과 그것에 따른 인쇄매체 중심의 실물장서와 벽있는 개체도서관의 생
명력에 대한 급격한 신뢰상실의 현상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머리속에 별별
이미지와 형상이 다 떠오른다. 거기에는 우선 바위처럼 엄연한 이 땅의 도
서관 현실이 버티고 있는데 그것과는 완전히 따로 노는 별세계와 같은 말
잔치의 희화성(caricature)이 있다. 그것은 한편의 풍자극(satire)에 다름 아
니다. 어린아이들 장난같기도 하다. 그래서 이하에서는 가상의 문헌정보학
교수A와 교수B의 입을 빌어 이 풍자극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담아 보기로
한다. 교수A와 교수B의 대화내용은 필자만의 아이디어라기 보다는 필자를
포함하여 부산대학교 대학원 문헌정보학과 공동작업실의 구성원들이 지난
1년간 공동으로 개발한 미래도서관 관련 담론들에서 재구성해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대화체의 기술방식을 시도하게 된 것은 내용의 희화성
에 기인한 면이 있지만, 다른 한편 이것은 위의 공동작업실 구성원들이 관
심을 두고 있는 '글쓰기의 혁신' '논문형식의 파괴' 작업과도 관련이 있음
을 암시해 두고자 한다. 이제 두 교수의 대화내용에 귀를 기울여 보자.
교수A : 여어! 이게 누군가? B교수 아닌가? 자네 왠 일인가? 그
먼 수도하고도 서울에서 이 곳 경상도 촌구석까지 내려오다니! 자
네가 오늘 아침 내 연구실에 들리리라곤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
교수B : 반갑게 맞이해 주니 고맙네. 실은 어제 자네네 대학에서
○○통신부 사람들하고 프로젝트 관련 회의를 하고 여기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지. 자네를 안보고 갈 수가 있어야지. 그래 아침부터
이렇게 쳐들어 온 것이라네.
교수A : 세월 참 좋다. 그런데, 이것 봐. 서울사람들 프로젝트 많
이 한다더니 사실로 판명되네. 그것도 ○○통신부 계통으로 말이
야. 나는 자네들이 왜 자꾸만 도서관과 멀어지나 했지. 그래 돈은
많이 벌었는가? 자네 얼굴 펴진 걸 보니 그런 것도 같으네.
교수B : 자네 왜 이러나. 나원 참…. 그나저나 골치 아파. ○○통
신부 이 친구들 말이야, 프로젝트 하나 던져주고 도서관은 아예 관
심도 없고 그 알량한 정보쪽으로만 끌고 가려고 하니. 이제 이 늙
은 몸에 프로젝트도 더는 못하겠어. 그런데 말이야, 나 자네한테
뉴스 하나 전해 줄까? 서울에서는 지금 자네의 악명이 자자하다네.
21세기를 눈앞에 둔 이 광명천지에 첨단에 둔감한 반동이라고 말
이야.
교수 A: 아, 그래. 악명이나마 서울 천지에 내 이름이 높다니 그
나마 다행으로 알겠네. 아무튼 B 교수 자네 지금 나의 호기심을
몹시 돋구는 발언을 하고 있는 거야. 오늘 자네 시간 좀 있나? 이
왕 이렇게 서두가 잡혔으니 우리 뿌리를 한 번 뽑고 보지. 그래 내
가 반동후진이라면 자네들 첨단선진의 내용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교수 B: 사람들 말로는 그러하더구먼. 자네네들은 도시 세상 돌
아가는 사정을 모르고 살아간다고 말이야. 지금 서구에서 급속한
속도로 진행중인 도서관 환골탈태의 특징을 자네 아는가? 그건 말
이야, 세 가지로 요약 가능한데 첫째, 도서관에서 책이 사라지고
있다. 둘째, 이용자가 굳이 도서관에 갈 필요가 없어지고 있다. 셋
째, 지구촌 어느 곳에 있는 정보든 이용할 수 있게 되어가고 있다
는 것일세. 즉 단적으로 말해 종래의 도서관이 변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며 그 새로운 도서관이 전자도서관이라 그 말씀이라네.
교수 A: 자네 엉터리 멋 한 번 잘 들었네. 듣던 대로 자네는 서
양이라면 사족을 바로 못쓰네 그려. 그런데 서양을 알려면 바로 알
아야지. 지금 자네들이 등에 업고 있는 도서관의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도 사실은 판도가 달라지고 있다네. 기술광신주의
자들이 일으키고 있는 '미래도서관 바람'을 물리치는 진단들이 속
속 나오고 있어. 그 진단들에 의하면 기술광신주의자들이 쫓는 것
은 허상이라는 거야. 또한 기술광신주의자들이 그리는 '꿈의 도서
관'이 지금까지 인류가 가꾸어 온 도서관에 순기능보다 역기능으
로 작용한다는 것이야. 이처럼 도서관의 기본을 지켜나가는 진단들
이 단행본으로 여러 권 출판되어 기술광신주의와 인쇄매체의 종말
을 예고하는, 도서관의 미래에 대한 '순진하면서도 단순한' 몇몇
전망을 논파하고 있어. 이 책들은 일부 도서관인들이 기술광신주의
가 일으키는 '꿈'의 의미와 결과를 철저히 생각해 보지 않은 채,
그 꿈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현상이 가지는 문제점
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네.
교수B : 진짜 그런 책들이 나왔어?
교수A : 진짜로 나왔지. 그럼 가짜로 나왔겠어? 책 이름들을 좀
대 줄까? 자네들 말이야 맨날 정보란 말 붙은 것, 그리고 텔리케뮤
니케이션 계통 자료나 보고 라이브러리 말 붙은 자료는 도시 안
보니 생각이 편향될 수밖에 더 있겠나?
교수B : 책 이름을 댄다더니 설교는 어인 설교인고?
교수A : 자네 나 한테 수업료 내야 돼. 나 이 책들 알아내는 데
노력께나 바쳤어. 몇 타이틀만 들어보지. 아마도 자네 주변에서는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해 본 책들일 것이야.
Walt Crawford and Michael Gorman, Future
Libraries: Dreams, Madness, and Reality. (ALA, 1995)
Michael Buckland, Redesigning Library Services: A
Manifesto. (ALA, 1992)
Michael Harris and Stan Hannah, Into the Future:
the Foundations of Library and Information Services in the
Post-Industrial Era. (Ablex, 1993)
Thoedore Roszak, The Cult of Information: A
Neo-Luddite Treatise on High Tech, Artificial Intelligence, and
the True Art of Thinkin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4)
교수B : 책소개까지 친절하게 해주니 고맙네. 그런데 자네 이 시
골구석에서 이렇게 고급스러워 보이는 책들을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되었나? 아무튼 자네가 권유하는 책이니 서울 가서 한 번 구해 읽
겠네. 그런데 말이지, 상식으로 생각해도 결국 인쇄매체는 소멸하
는 것 아닌가? 자네 생각은 어때?
교수A : 자네 말이야, 길을 한 번 잘못 들어도 되게 잘못 들었
어. 한 번 발이 미끄러진 시각에서 보면 '인쇄매체의 소멸'이라든
가 '전자매체로의 대체' 따위가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보이겠지.
그래서 그것이 미래도서관을 논하는 모든 논의들의 출발점이자 전
제조건이 될 터이니까. 도서관의 자료가 전자매체 중심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전제 아래에서만이 자네류의 미래도서관론자들이 말하는
소장에 대한 접근 우위라든가, 벽과 건물의 해체 따위의 괴변이 형
성될 소지가 생기는 법이지. 그러나 내가 소개한 책들을 자네가 인
내심을 가지고 곰곰이 읽어보고 또 현실을 직시하면 금방 알게 되
는 것이지만 인쇄매체는 결코 사라지고 있지 않아. 또한 미래에 인
쇄매체가 사라진다는 어떤 징후도 발견되고 있지 않아. 자네처럼
인쇄매체가 가까운 미래에 전자매체로 대체될 것이라고 예견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될 것이란 합리적인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어.
전자매체의 지지자들은 도서, 잡지, 신문 등의 인쇄매
체는 곧 사라질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오히려 이를 반증하는 여러
가지 사례들이 있지. 즉 도서판매량의 지속적인 증가, 인쇄 출판산
업의 계속적인 성장, 도서관 도서대출량의 증가 등이 그 사례들이
야.
그러나 일부의 인쇄매체들은 전자매체로 대체되어 갈
것임은 예상할 수 있어. 경제성이라든가 효율성, 신속성 등을 고려
할 때 다음과 같은 자료들은 전자매체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어. 작은 단위로 이용되고 신속성이 강조되는 인쇄물들,
즉 사전, 색인, 관보, 연감류 등이 이에 해당하지. 그러나 객관적으
로 평가해 볼 때 이 범주에 드는 것은 자네류의 미래론자들이 믿
는 것보다는 그 양이 훨씬 적은 편이라고 볼 수 있어.
따라서, 내 생각은 그래. 미래의 도서관은 지식과 정보
를 전달하기 위해 모든 유형의 매체를 활용할 것이라는 거야. 분명
한 것은 이전의 수단들은 강화되고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향상되어 보충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란 점이야. 새로운 커
뮤니케이션 매체와 기존의 매체는 서로 일장일단이 있으므로 상호
보완적 의미에서 선택적 사용이 효율적일 것이라고 보는 거야.
<계속 이어집니다>
학술강연회에서 발표된 부산대 김정근 교수님의 강연내용입니다.
3번에 나누어 게시합니다.
자료는 동아대학교 도서관 김현철 님이 제공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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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물장서, 아직도 중요한가?
김 정 근
부산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
I. 글을 시작하며
이번 행사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는 전화를 받은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아마도 지난 8월 언제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필자는 그 때 마
음에 와 닿는 부분이 있어 별다른 주저함이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동의를
하였다. 우선 11월에 있을 행사준비를 8월부터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
는 그 때 바쁠 것이다. 그래서 못한다.'라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사람에
게는 염치가 있는 법. 아무리 필자와 같이 세상물정 모르고 살아가는 터이
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점 동아대학교 도서관측의 준비성에 대하여 다
시 한 번 경의를 표하고 싶다. 다음으로는 이 모임의 중요성과 관련된 부분
이었다. 이 모임이 마이클 고어먼관장(Dean Michael Gorman)을 중심으로
준비되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 필자는 순간적으로 저으기 놀랐다. '세
상에 이런 다행한 일이 있을 수 있다니!'하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의 발
언이 우리 학계와 관계에 미칠 긍정적 영향과 파장을 생각하니 흥분이 되
어 오기도 하였다. 당연히 필자의 참여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 뒤 이 번
행사가 동아대학교 도서관 단독주최에서 한국도서관 정보학회와의 공동주
최로 조정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분이 가지고 올 메시지의 무
게에 비추어 참으로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학회
측의 안목과 기민성 또한 필자를 놀라게 하였다. 고어먼 관장의 메시지는
우리의 도서관 현장 뿐 아니라 학계가 함께 부딪쳐 있는 중대 관심사안이
라고 할 수 있는 미래도서관 담론에 대하여 적절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
할 것이라고 필자 나름으로 단단히 믿고 있었다.
실은 마이클 고어먼이란 이름은 그전에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이름이
기는 하지만 특히 최근 1년간 월트 크로포드(Walt Crawford)란 이름과 함
께 필자에게는 매우 친숙하고 소중한 이름이 되어 있다. 그것은 두 사람이
함께 쓴 미래도서관 : 환상인가, 광기인가, 현실인가 (Future Libraries :
Dreams, Madness, and Reality. Chicago : ALA, 1995)를 통해서이다. 필
자는 작년이래 이 책을 부산대학교 대학원 문헌정보학과의 여러 세미나 코
스에 소개해 두고 있다. 거기에서 지금 우리의 도서관계와 학계의 거의 모
든 영역을 무차별적으로 강타하고 있는 기술광신주의에 대한 대처방안을
젊은 연구자들과 더불어 논의하면서 이 책을 하나의 안목으로서, 지혜로서
활용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생산된 것들이 (글이 서툴러 여기서 소개하기
가 부끄럽긴 하지만) 다음의 논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근 이용재. "참
을 수 없는 '미래도서관 담론'의 가벼움" 圖書館文化, 제37권 4호 (1996. 7
8); 김정근 김종성. "계몽의 아침에 꾸는 악몽 : 도서관의 미래에 한국문헌
정보학은 희망인가?". 도서관, 제51권 3호 (1996. 가을); 김정근 김영기. "다
시 '미래도서관 담론'과 관련하여" 圖書館文化, 제37권 5호 (1996. 9 10)
앞으로도 이 계통의 글들이 몇 편 더 발표될 예정으로 있다. 필자와 필자의
공동작업자들은 이 글들에서 고어먼 관장을 여러번 인용하고 있다. 차라리
'맹렬하게 인용했다'고 표현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그만큼 그의 글은 강
렬함을 띠고 있었고 우리의 현실에서 아쉽고도 절실한 곳을 때려주고 있었
다.
오늘로부터 약 2주전 주최측으로부터 발표할 글의 제목을 요청받았다.
그 때 하루를 생각한 끝에 제시한 것이 "실물장서, 아직도 중요한가?"였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하여 오늘 우리 도서관계와 학계 위를 자욱하게 내려와
뒤덮고 있는 장서허무주의, 도서관허무주의의 정체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벽 있는 도서관, 종이책, 그리고 사서직의 불멸성에 대해 말해 보고
싶었다. 기술광신주의의 한국적 변용과 그 폐해에 대하여 토론해 보고 싶
었다. 내용을 이렇게 잡는 것이 필자가 책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고어먼
관장의 특별강연 내용과도 일맥이 통하여 조화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
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던 중 오늘로부터 일주일전 고어먼 관장의 강연
내용을 주최측으로부터 전달받아 읽게 되었다. 읽고난 후 필자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다. 거기에는 권위와 자신에 차 있는, 그리고 책임있
는 이 시대의 한 도서관인이 버티고 서 있었다. 짐작했던 대로 고어먼 관장
은 그의 글속에 지금 이 땅의 현실에 너무도 적합하고 유익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는 도서관인의 꿈은 결코 '기술광신주의'로 풀 수 없으며 냉정한
'현실주의'로써 실현할 수밖에 없음을 힘찬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는
넓은 시각에서 기술광신주의 광풍의 성격을 분석하면서 이것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서 전통의 대치(replacement)가 아닌 그것에의 추가(addition)와 보
강(reinforcement)이라고 하는 원칙론적 입장을 제시하고 있었다. 필자가
"실물장서, 아직도 중요한가?"라는 제목 밑에 담고자 했던 이 땅의 이야기
가 고어먼 관장의 원칙론에 완전히 일치해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이번
행사의 조화로운 분위기를 위하여 저으기 안심이 되기도 하였다.
II. 글을 펼치며
지금 우리 도서관계와 학계에서 세차게 일고 있는 디지털 라이브러리
바람과 그것에 따른 인쇄매체 중심의 실물장서와 벽있는 개체도서관의 생
명력에 대한 급격한 신뢰상실의 현상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머리속에 별별
이미지와 형상이 다 떠오른다. 거기에는 우선 바위처럼 엄연한 이 땅의 도
서관 현실이 버티고 있는데 그것과는 완전히 따로 노는 별세계와 같은 말
잔치의 희화성(caricature)이 있다. 그것은 한편의 풍자극(satire)에 다름 아
니다. 어린아이들 장난같기도 하다. 그래서 이하에서는 가상의 문헌정보학
교수A와 교수B의 입을 빌어 이 풍자극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담아 보기로
한다. 교수A와 교수B의 대화내용은 필자만의 아이디어라기 보다는 필자를
포함하여 부산대학교 대학원 문헌정보학과 공동작업실의 구성원들이 지난
1년간 공동으로 개발한 미래도서관 관련 담론들에서 재구성해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대화체의 기술방식을 시도하게 된 것은 내용의 희화성
에 기인한 면이 있지만, 다른 한편 이것은 위의 공동작업실 구성원들이 관
심을 두고 있는 '글쓰기의 혁신' '논문형식의 파괴' 작업과도 관련이 있음
을 암시해 두고자 한다. 이제 두 교수의 대화내용에 귀를 기울여 보자.
교수A : 여어! 이게 누군가? B교수 아닌가? 자네 왠 일인가? 그
먼 수도하고도 서울에서 이 곳 경상도 촌구석까지 내려오다니! 자
네가 오늘 아침 내 연구실에 들리리라곤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
교수B : 반갑게 맞이해 주니 고맙네. 실은 어제 자네네 대학에서
○○통신부 사람들하고 프로젝트 관련 회의를 하고 여기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지. 자네를 안보고 갈 수가 있어야지. 그래 아침부터
이렇게 쳐들어 온 것이라네.
교수A : 세월 참 좋다. 그런데, 이것 봐. 서울사람들 프로젝트 많
이 한다더니 사실로 판명되네. 그것도 ○○통신부 계통으로 말이
야. 나는 자네들이 왜 자꾸만 도서관과 멀어지나 했지. 그래 돈은
많이 벌었는가? 자네 얼굴 펴진 걸 보니 그런 것도 같으네.
교수B : 자네 왜 이러나. 나원 참…. 그나저나 골치 아파. ○○통
신부 이 친구들 말이야, 프로젝트 하나 던져주고 도서관은 아예 관
심도 없고 그 알량한 정보쪽으로만 끌고 가려고 하니. 이제 이 늙
은 몸에 프로젝트도 더는 못하겠어. 그런데 말이야, 나 자네한테
뉴스 하나 전해 줄까? 서울에서는 지금 자네의 악명이 자자하다네.
21세기를 눈앞에 둔 이 광명천지에 첨단에 둔감한 반동이라고 말
이야.
교수 A: 아, 그래. 악명이나마 서울 천지에 내 이름이 높다니 그
나마 다행으로 알겠네. 아무튼 B 교수 자네 지금 나의 호기심을
몹시 돋구는 발언을 하고 있는 거야. 오늘 자네 시간 좀 있나? 이
왕 이렇게 서두가 잡혔으니 우리 뿌리를 한 번 뽑고 보지. 그래 내
가 반동후진이라면 자네들 첨단선진의 내용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교수 B: 사람들 말로는 그러하더구먼. 자네네들은 도시 세상 돌
아가는 사정을 모르고 살아간다고 말이야. 지금 서구에서 급속한
속도로 진행중인 도서관 환골탈태의 특징을 자네 아는가? 그건 말
이야, 세 가지로 요약 가능한데 첫째, 도서관에서 책이 사라지고
있다. 둘째, 이용자가 굳이 도서관에 갈 필요가 없어지고 있다. 셋
째, 지구촌 어느 곳에 있는 정보든 이용할 수 있게 되어가고 있다
는 것일세. 즉 단적으로 말해 종래의 도서관이 변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며 그 새로운 도서관이 전자도서관이라 그 말씀이라네.
교수 A: 자네 엉터리 멋 한 번 잘 들었네. 듣던 대로 자네는 서
양이라면 사족을 바로 못쓰네 그려. 그런데 서양을 알려면 바로 알
아야지. 지금 자네들이 등에 업고 있는 도서관의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도 사실은 판도가 달라지고 있다네. 기술광신주의
자들이 일으키고 있는 '미래도서관 바람'을 물리치는 진단들이 속
속 나오고 있어. 그 진단들에 의하면 기술광신주의자들이 쫓는 것
은 허상이라는 거야. 또한 기술광신주의자들이 그리는 '꿈의 도서
관'이 지금까지 인류가 가꾸어 온 도서관에 순기능보다 역기능으
로 작용한다는 것이야. 이처럼 도서관의 기본을 지켜나가는 진단들
이 단행본으로 여러 권 출판되어 기술광신주의와 인쇄매체의 종말
을 예고하는, 도서관의 미래에 대한 '순진하면서도 단순한' 몇몇
전망을 논파하고 있어. 이 책들은 일부 도서관인들이 기술광신주의
가 일으키는 '꿈'의 의미와 결과를 철저히 생각해 보지 않은 채,
그 꿈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현상이 가지는 문제점
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네.
교수B : 진짜 그런 책들이 나왔어?
교수A : 진짜로 나왔지. 그럼 가짜로 나왔겠어? 책 이름들을 좀
대 줄까? 자네들 말이야 맨날 정보란 말 붙은 것, 그리고 텔리케뮤
니케이션 계통 자료나 보고 라이브러리 말 붙은 자료는 도시 안
보니 생각이 편향될 수밖에 더 있겠나?
교수B : 책 이름을 댄다더니 설교는 어인 설교인고?
교수A : 자네 나 한테 수업료 내야 돼. 나 이 책들 알아내는 데
노력께나 바쳤어. 몇 타이틀만 들어보지. 아마도 자네 주변에서는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해 본 책들일 것이야.
Walt Crawford and Michael Gorman, Future
Libraries: Dreams, Madness, and Reality. (ALA, 1995)
Michael Buckland, Redesigning Library Services: A
Manifesto. (ALA, 1992)
Michael Harris and Stan Hannah, Into the Future:
the Foundations of Library and Information Services in the
Post-Industrial Era. (Ablex, 1993)
Thoedore Roszak, The Cult of Information: A
Neo-Luddite Treatise on High Tech, Artificial Intelligence, and
the True Art of Thinkin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4)
교수B : 책소개까지 친절하게 해주니 고맙네. 그런데 자네 이 시
골구석에서 이렇게 고급스러워 보이는 책들을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되었나? 아무튼 자네가 권유하는 책이니 서울 가서 한 번 구해 읽
겠네. 그런데 말이지, 상식으로 생각해도 결국 인쇄매체는 소멸하
는 것 아닌가? 자네 생각은 어때?
교수A : 자네 말이야, 길을 한 번 잘못 들어도 되게 잘못 들었
어. 한 번 발이 미끄러진 시각에서 보면 '인쇄매체의 소멸'이라든
가 '전자매체로의 대체' 따위가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보이겠지.
그래서 그것이 미래도서관을 논하는 모든 논의들의 출발점이자 전
제조건이 될 터이니까. 도서관의 자료가 전자매체 중심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전제 아래에서만이 자네류의 미래도서관론자들이 말하는
소장에 대한 접근 우위라든가, 벽과 건물의 해체 따위의 괴변이 형
성될 소지가 생기는 법이지. 그러나 내가 소개한 책들을 자네가 인
내심을 가지고 곰곰이 읽어보고 또 현실을 직시하면 금방 알게 되
는 것이지만 인쇄매체는 결코 사라지고 있지 않아. 또한 미래에 인
쇄매체가 사라진다는 어떤 징후도 발견되고 있지 않아. 자네처럼
인쇄매체가 가까운 미래에 전자매체로 대체될 것이라고 예견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될 것이란 합리적인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어.
전자매체의 지지자들은 도서, 잡지, 신문 등의 인쇄매
체는 곧 사라질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오히려 이를 반증하는 여러
가지 사례들이 있지. 즉 도서판매량의 지속적인 증가, 인쇄 출판산
업의 계속적인 성장, 도서관 도서대출량의 증가 등이 그 사례들이
야.
그러나 일부의 인쇄매체들은 전자매체로 대체되어 갈
것임은 예상할 수 있어. 경제성이라든가 효율성, 신속성 등을 고려
할 때 다음과 같은 자료들은 전자매체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어. 작은 단위로 이용되고 신속성이 강조되는 인쇄물들,
즉 사전, 색인, 관보, 연감류 등이 이에 해당하지. 그러나 객관적으
로 평가해 볼 때 이 범주에 드는 것은 자네류의 미래론자들이 믿
는 것보다는 그 양이 훨씬 적은 편이라고 볼 수 있어.
따라서, 내 생각은 그래. 미래의 도서관은 지식과 정보
를 전달하기 위해 모든 유형의 매체를 활용할 것이라는 거야. 분명
한 것은 이전의 수단들은 강화되고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향상되어 보충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란 점이야. 새로운 커
뮤니케이션 매체와 기존의 매체는 서로 일장일단이 있으므로 상호
보완적 의미에서 선택적 사용이 효율적일 것이라고 보는 거야.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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