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글을 끝내며
물론 교수A와 교수B는 가상의 입장이다. 교수A는 대구에 위치할 수
도 있고 창원에 위치할 수도 있다. 교수B는 하필 서울에서 내려 올 필요가
없다. 그는 광주에서 올 수 있고 대전에서도 올 수 있다. 어느 특정의 모델
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필자가 이 대화에서 시도해 본 것은 다양한 현
실의 양태로부터 어떤 요소들을 추출하여 그것들에서 서로 대립하는 두 가
지의 전형을 구성해 본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둘의 입장을 통해 우리
현실에 대한 약간의 성찰의 기회를 가져보자는 것이었다.
필자는 우리 문헌정보학계와 도서관계 위에 자욱히 내려와 있는 이 안
개가 하루 빨리 걷히기를 바라고 있다. 기술광신주의 바람이 잠이 들고 그
자리에 벽 있는 도서관, 실물장서가 있는 도서관에 대한 믿음이 새롭게 들
어서기를 기대한다. 필자는 실물장서와 디지털 접근은 둘 다가 장점이 있
는 것이라고 본다. 다만 현실론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거기에는 균형의 문
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새 것이 오랜 역사의 실험을 거친 전통적인 것을
깡그리 물러 세운다고 하는 대치(replacement)의 입장은 여러 가지 정황과
물증으로 보아 광기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요컨데 도서관현장이 문제다.
우리는 강한 현장을 원한다. 어느 길이 우리에게 생명력 있는 현장을 가져
다 줄 것인가? 여기서 필자는 전통적인 것이 새 것의 힘을 원용한다고 하
는 뜻에서 보강(reinforcement)의 입장을 견지한다.
위의 대화에서 필자는 교수A를 지나치게 두둔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도서관을 중심으로 하는 보강의 입장에서 논지를 이끌
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화에서는 우리 도
서관계와 문헌정보학계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존재하는 교수B의 입장이 지
나치게 격하되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다른 어떤 기회에 교수B의 입장
도 조금은 더 자상하게 경청이 되고 챙겨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반면, 이
점에 있어서는 또다른 설명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것은 이 대화 자체 안에
서는 교수B의 입장이 경시되어 있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우
리 주변의 다른 많은 문헌 속에서는 교수B의 입장이 역으로 지나치게 우대
되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거기서는 오히려 교수A의 입장이 약하게
되어 있거나 아주 없는 경우도 많다고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글의 독
자들에게는 입장을 정리해 볼 수 있는 선택의 폭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
다.
끝으로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미국과 같은 도서관 선진국의 처
지에서는 기술광신주의의 바람도 큰 폐해를 낳지는 않을 것이며 오히려 전
통적 도서관을 자극하여 더욱 발전하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반면 한국과 같은 도서관 개척기의 사회에서는 기술광신
주의의 노도는 도서관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도서관 자
체를 삼켜 먹고 마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100년도 넘는 현대적 도서관직의 역사 속에서 강력한 도
서관현장을 완성하였다. 도서관직과 그 관련직업에 종사하는 전문가의 규
모가 이십만명선이다. 그들은 개체 도서관별로, 다시 서로 연계의 형태로
화려하고 거대한 실물장서와 시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들에게 정보기
술은 축복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어떤가? 사서직의 고용규모가
오천명선이다. 실물장서와 시설도 빈약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직업
군으로서 오천명은 인구 오천만의 나라에서 너무 왜소하다. 그나마 그들마
저도 약간의 과장법을 사용하자면 거의 맨손이다. 그들에게는 그들로 하여
금 실세로 일어설 수 있도록 배경이 되어 주는 튼튼한 실물장서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정보기술의 광풍은 직업자체의 생명에 지장을 줄 수 있다
는 것이다. 이 바람 속에서 도서관직 자체가 연기처럼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령, 문헌정보학과는 삼류 전산학과의 형태로, 그러다가는 다시 흡
수통합의 단계로, 그리고 사서직은 검색서기로 전락해 갔을 때 사실상 이
땅에서 참된 의미에서의 도서관직은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필자는 이 기회에 이같이 한 번 제안해 보고자 한다. 특히 이
제안을 우리 도서관계와 학계의 현재와 미래의 지도자들에게 던지고 싶
다. 우선 우리 도서관직업군의 규모를 지금의 열 배가 되는 오만명 정도로
키울 수 있도록 비전을 가지자는 것이다. 그러자면 우선 도서관과 그 관련
기관의 수가 많아져야 한다. 또한 규모도 커져야 한다. 무엇보다 단위도서
관의 실물장서의 규모가 크고 내용이 좋아져야 한다. 거기서 직업적 힘이
생겨난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한 설득과 논리는 개발만 하면 얼마든지 있
다. 단위도서관의 실물장서의 규모와 관련하여 미국과 캐나다의 중요 연구
장서를 대표하는 연구도서관협의회(Association of Research Libraries)의
현황이 하나의 시사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협의회의 108개 회원도서관 가
운데 장서수는 하버드대학의 천삼백만권이 1위 , 콜로라도 주립대학의 백육
십만권이 108위이다. 연증가권수는 하버드대학의 이십육만권이 1위, 워털루
대학의 삼만권이 108위이다. 연속간행물 보유종수는 하버드대학의 구만육
천종이 1위, 켄트주립대학의 만천종이 108위이다. 우리의 경우 서울대학의
단행본 백팔십만권, 연속간행물 만천종(그 중 구입은 오천팔백종)의 보유에
다, 단행본 연간증가권수 육만구천권(그 중 구입은 사만삼천권)이 최대규모
이다. 서울대학 이외에 단행본 백만권을 넘긴 대학이 1996년 현재 이제 겨
우 여섯군데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래서는 안된다. 필자의 생각에는 우리
나라에도 북미의 연구도서관협의회 회원교 108개교 가운데 삼분의 일선이
되는 35위 전후의 단행본 삼백만권대, 연속간행물 삼만종대, 그것의 이분의
일선이 되는 50위권 전후의 단행본 이백오십만권대, 연속간행물 이만종대의
대학도서관이 전국적으로는 다수, 부산지역에도 두어 곳 정도는 빠른 시일
안에 생겨나야 한다고 본다. 일본의 경우 동경대학이 육백팔십만권, 경도대
학이 오백십만권을 넘기고 있다. 중위권대학인 신호대학이 이백오십만권,
명고옥대학이 이백삼십만권, 법정대학이 이백만권 이런 식이다.
필자는 미국인, 일본인이 무엇을 모르거나 비합리적이거나 비현실적이
어서 저처럼 실물장서에 관심을 가진다고는 보지 않는다. 도서관 문제에
관한한 왕도가 없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우리의 경우
도 튼튼한 실물장서가 기초가 되었을 때 전산화나 디지털화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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