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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에 남긴 발자욱

[책이야기] 우리나라 동인지 문화

[책 이야기] 우리나라의 동인지 문화

근대적인 의미의 첫 동인지이자 문예지는 1919년 2월에 창간된 <창
조>였다. 판형은 국판, 지면은 81면이었으며 유가지였다. 발행인은 주
요한, 실질적인 전주는 평양갑부 아들인 김동인이었다.
이 잡지의 주요 편집자들은 위의 두 사람을 비롯 김환, 최승만, 전영
택이었다. 모두 한국문학사의 초석을 다진 사람들이었다. <창조>는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동인들의 나이만 보아도 이
를 짐작할 수 있다, 창간 당시 김동인과 주요한은 19세였고 전영택은
25세였다. 창간호에 실렸던 작품은 단편의 효시인 김동인의 <약한 자
의 슬픔>과 초창기 상징주의 시의 백미인 주요한의 <불놀이>였다.
(김은신 지음 <이것이 한국최고> 참조)
<창조>는 국내 문학사에 큰 의미를 갖는다. 계몽주의를 거부하고 사
실주의를 표방했으며, 구어체 문체를 확립하는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
했다. '이더라''하도다''이로다'식의 문체를 '이다''이었다''한다'로 표기한
것이다.
이 동인지는 1921년 5월, 제9호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다. 당연히 책
이 팔릴 리는 없었고, 김동인의 자금마저 박닥이 났던 것. 김동인은
폐간의 편을 <문단 30년사>라는 글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폐간의 진정한 원인 내지 이유는 무제한한 인비(人費)였으니 마지막
에는 3천부까지 소화되었지만 그 매상대금은 어디론가 없어지고 매번
을 새로 새 비용을 내온 것이 괴로웠다. 게다가 나도 차차 방탕에 빠
지어 문학보다도 방탕에 더 고혹을 느끼게 되어...."
그 이후 국내 문단은 수없이 명멸한 문예지와 동니지의 성격을 겸한
잡지들에 의해 꾸려져 왔다. 암울했던 시대 언론이 하지 못하던 일을
과감하게 해냈던 <문학과 지성> <창작과 비평> 등도 국내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잡지들이었다.
그중 <창작과 비평>이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1966년 1월 영문학
자 백낙청의 주도로 만들어진 창간호는 132면에 가격은 70원이었다.
이후 <창작과 비평>은 숱한 문인들과 문학작품의 근거지가 되면서
한국문학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
<창작과 비평>이 1980년 비상게엄하 언론통폐합 조치에 의해 여름호
(56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자 지식인 3천여명은 항의성명을 발표하
기도 했다. 1986년 복간의 조건으로 공권에 의해 때아닌 '창씨개명;을
당했던 <차악과 비평>은 2년 후인 88년 이름을 다시 찾게 된다. 5월
항쟁의 결과였다.
이렇듯 한국문학의 역사는 곧 각 시대를 대표했던 동인지의 역사였
다. 500여종의 동인지와 문예지가 난립하고 있는 지금도 국내 문학의
흐름을 가장 정치하게 보여주는 것은 역시 이들 문예지에 발표되는
작품들과 평문, 대담 등이다. 이들 문예지를 중심으로 짜여지는 문인
들의 계보 역시 동시대의 문학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성감대의 역할
을 한다.
'96 문학의 해를 맞아 첫 사업으로 조직위측이 '동안지 콘테스트'를
열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우수 동인지를 선발해 상금을 주는 것도
좋지만 왠지 석연치 않다.
시간이 지나 한 시대의 정신문화를 보여 주는 유산으로 남을 수도 있
는 '동인지 문화'를 당대에 점수를 매긴다는 발상이 그렇다

출처 : 출판저널 1996년 2월 5일(185호) 재미있는 책 이야기

** 내가 대학 1학년 때이던 1978년 교양국어 시간의 시험문제가 기억
난다. 70년대 대표적인 문예지에 대해 쓰라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가
장 대표적이던 동인지였던 <창작과 비평>에 대해 주먹구구식으로라
도 써 낼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뭐라 썼는지... 영인본을 가지고 있는
데 가끔 들추어보면 당시 암울한 시대에 정신적 지주였던 그 힘이 느
껴진다.

낙골 재두루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