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MHNEWS)
날 짜 : 97/2/5
제목: <서평>권정생씨의 '우리들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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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씨가 오랜만에 산문집 ‘우리들의 하나님’을 냈다. ‘오물덩이처
럼 뒹굴면서’(1986년)를 낸 뒤로 동화집말고는 이것이 두번째로 나온 산문
집이지만, 이 작가가 이웃과 세상에 대해서 하고싶은 말을 쓴 글을 모은 책
으로는 이것이 처음이다.
스무살까지 두 차례나 끔찍한 전쟁을 겪고, 유랑 걸식으로 온갖 밑바닥 생
활을 다한 끝에 몸이 망가질대로 망가져서 한 순간도 병든 아픔에서 벗어나
지 못하는 이 작가가, 그래도 회갑이 되는 지금까지 살아서 이런 글을 써냈
다는 사실이 그저 기적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지만, 이 책을 읽으면 또 그
이상으로 놀라운 일을 발견하게 되고 커다란 감동을 받게 된다.
이 작가가 도시문명이라는 이 미친 인류의 질병에 진작부터 절망하고는,
다만 마지막 희망인 자연과 농사꾼들의 삶이라도 지켜보고싶어서 고향 마을
한쪽에 자리잡고 살아온 지가 벌써 30년이 지났다. 그동안 동화쓰기를 살
아가는 표적으로 삼았지만 여러 해전부터 동화를 못 쓰게 되었다. “이젠
농사꾼도 없어요. 악착같이 돈만 계산하는 장사꾼밖에 없어요. 아이들도 무
섭게 자라나고요. 아주 살벌한 세상이 됐어요. 그까짓 동화 써서 무슨 소용
이 있어요.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준다는 동화가 죄다 속임수밖에 아무것도
아니지요” 이것이 동화 쓰기를 권하는 내 말에 대한 작가의 대답이다.
오직 하나 희망을 걸었던 고향사람들의 삶이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나고,
아이들도 무서운 어른으로 병들고, 자연은 처참하게 짓밟히고… 이래서 목
숨의 표적이었던 동화조차 쓰지 못한 작가가 어떻게 그동안 그 절망을 버티
고 살았던가 싶었는데, 이 책을 읽으니 내 의문이 조금은 풀렸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할 말이 많았구나. 착하고 아름답게 살던 사람들에 대해서, 짓
밟혀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황금과 인간의 끝없는 탐욕에 대해서, 허망한
도시에 대해서, 전쟁과 권력에 대해서, 더구나 거짓된 기독교에 대해서, 지
구와 인류의 종말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말이 너무 많아
벼랑끝까지 달려온 인류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증언자가 된 심경으로 이런
글을 쓰면서(저자의 말을 따르자면 그런 증언을 해봤자 별볼일 없는 것이지
만) 살아왔구나 싶었다.
아무튼 이 책에서는 도무지 한치 앞을 내다볼 줄 모르는 개발과 경쟁으로
달려가는 인간의 길이 다만 죽음의 길임을 목청껏 경고하는 한편,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어디 있는지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살
아갈 수 있는 길은 자연과 함께 사는 길이요, 자연의 한 부분으로 가난하게
사는 길이다. 그래서 가난과 자연은 이 작가의 사상을 이룬 바탕이 되고
알맹이가 되고 있으며, 모든 글의 주제가 되고 글감이 되어있다. 가난과 자
연을 아름답게 말하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이 작가가 말하는 가난과 자연
은 그만이 살아온 남다른 체험에서 우러난 아주 충격을 주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서 예사로 들어넘길 수 없다.
우리 신문학이 생겨난 뒤로 지금까지 백년동안 수많은 작가가 나왔지만,
권정생씨만큼 가난하게 살았던 작가는 없었다. 그는 가난한 조국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아주 어른이 되어서도 또 즐겨 그 가난의 길을 골라서 살
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있다. 가난하고 불편하게 사는 것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고, 모든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구원의 길이기 때문이다. 하늘
을 날아가는 새와같이, 땅을 기어가는 벌레같이 사는 것이다.
저자가 예배당 아래채 흙담집 방 한칸을 빌려 살때 이야기를 쓴 글이 이
책에 조금 나오는데 이렇다.
‘…여름에 소나기가 쏟아지면 창호지문에 빗발이 쳐서 구멍이 뚫리고 개
구리들이 그 구멍으로 뛰어들어와 꽥꽥 울었다. 겨울이면 아랫목에 생쥐들
이 와서 이불속에 들어와 잤다. 자다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옷속으로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 들어오기도 했다. 처음 몇번은 놀라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지내다보니 그것들과 정이 들어서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
을 놓아두고 기다렸다.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같은 햇빛아래
같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살다죽는게 아닌가.…’
이쯤되면 ‘무소유’란 말도 사치한 꾸밈말이 된다. 이래서 동화 ‘강아지
똥’을 쓰게되고, 송아지이야기며 산토끼이야기를 쓰게된 것이다. 이 작가
에게는 동화가 머리로 지어낸 ‘창조’가 아니라 온몸으로 겪은 사실을 그
대로 다듬어 내는 살아있는 말이요 기록이라 하겠다.
권정생씨는 자신의 병든 몸에 대해서, 그 아픔에 대해서 좀처럼 글을 쓰지
않았는데 이 책에는 한두 군데 잠깐 썼다.
그것마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웃어넘기도록 쓴 것이다. 보통사람이라면
그런 몸으로 견디지 못해 흔히 자살을 하든지, 살더라도 자기 몸밖에 아무
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겠는데, 권정생씨는 아주 반대로 자기 한 몸에 관해
서는 도무지 말하는 법이 없고 오직 아이들의 앞날과 세상 일과 겨레와 인
류 전체 문제에만 매달려 걱정한다. 그야말로 ‘큰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적어둘 말이 있다. 며칠전 이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란 말이 한 군데 나오네요”했더니 “글쎄요. 저는 ‘그
여자’라고 썼는데 출판사에서 ‘그녀’라고 고쳐 놓았어요”했다. 이래서
되겠는가?
… 평자는 교육자출신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한국일보 신춘문예 수
필로 문단에 나왔으며, 지금은 아동문학 평론과 바른 글쓰기 운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우리글 바로쓰기’1, 2, 3권 외에 3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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