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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에 남긴 발자욱

][ [북리뷰#12] 영국 책 여행

문화일보 (MHNEWS) 현대문화
기사분류: 15. 기획/연재
기사일자: 97/02/05
제 목: <지구촌책 여행(5)> 동화같은 시골에서 탄생한 '토끼神話'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윈더미어 역으로 간다. 윈더
미어 호수에서 작은 페리를 타고 니어소리 마을에서 내린다. 풀밭 사이로
난 좁은 길을 30분쯤 걸어가면 피터 래빗의 작가 비아트릭스 포터가 살았던
힐탑 농장이 보인다.
미국인에게 미키마우스가 있다면 프랑스인에게는 코끼리 바바가 있고, 영
국인에게는 피터 래빗이 있다. 아이들이 입는 파자마에서 어른들이 차 마시
는 찻잔에까지 어디에나 새겨져 있는 피터 래빗은 단순히 사랑받는 귀여운
동물캐릭터가 아니라 영국 현대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신화가 된 지 오래다.

1866년 런던에서 태어난 비아트릭스 포터는 여름 휴가를 보내던 레이크 디
스트릭트에 매료되었다. 그곳에서 "진정한 세상"을 발견한 것이다. 수많
은 호수와 목초지, 낮은 언덕과 높은 산, 야생화와 밭작물이 어우러진 레이
크 디스트릭트를 워즈워스는 "자연계의 연합"이라고 불렀고 콘스타블, 터
너, 러스킨 등은 수없이 화폭에 옮겼다.브라우닝, 테니슨 등은 "레이크 디
스트릭트 영구보존협회"를 만들어 그 곳을 산업화와 개발로부터 보호하려
고 했다.
그러나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진정한 수호신은 비아트릭스 포터였다. "피
터 래빗 이야기"의 성공 이후 23권의 그림책을 차례로 펴내면서 포터는 인
세 수입을 모두 "내셔널 트러스트"라는 자연보호 재단에 기부했고, 그 결
과 레이크 디스트릭트는 백년 전의 모습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채 보존
되어 있다.
전세계에서 포터의 독자들이 순례자처럼 레이크 디스트릭트로 끝없이 찾아
든다. 그리고 백년의 세월을 거슬러올라가 그림책 그대로의 풍경에 빠져든
다. 눈 돌리는 곳, 발 닿는 곳마다 포터 갤러리, 기념관, 전시장, 가게 들
이 가득하다. 말 그대로 동화 속 나라로 온 듯하다. 골목 모퉁이를 돌면 옷
을 입은 토끼, 고슴도치, 다람쥐들이 뒷발로 걸어나올 것 같고, 급기야는
내 자신이 뒤뚱거리며 걷는 오리가 되는 환상에 잠기게 된다.
그러나 포터는 공상가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예리한 눈으로 현실과 인
간을 관찰한 리얼리스트이기도 했다. 그녀의 작품에서도, 생애에서도 이 환
상과 현실은 자기 자리를 찾아 지킨다.
"그 양반은 아이들을 안 좋아했어. 담 위에 올라간 걸 보면 얼마나 야단
을 했는데" 한 마을 할머니는 어렸을 때 보았던 포터를 이렇게 회고한다.
47세에야 비로소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결혼했던 포터는, 작품활동은 중
단한 채 농장경영에만 전념하는 무뚝뚝한 할머니가 되었다. 그리고 양 사육
에도 뛰어난 기술을 발휘해 가축 품평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포터가 세상을 떠났을 때 마을 사람들은 유명한 작가의 죽음보다는 훌륭한
농부의 손실을 더 슬퍼했다. 포터가 살았던 힐탑 농장에서는 지금도 관리
인이 수만 마리의 양떼를 돌보며 살고 있다.
백년 전 포터의 책을 처음 출판했던 워렌사는 아직도 피터 래빗 시리즈를
내고 있다.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자연 그대로 지키려고 애썼던 포터처럼,
그들도 그 이야기를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디즈니사의 만화영화화
제의를 거절하고 원작의 스토리와 화풍을 그대로 살려낸 비디오를 직접 만
들기도 했다. 세계적인 도서전시회에 가면 워렌사의 부스 거의 전부를 차지
하고 있는 피터 래빗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독일의 시골마을 크리스마스
장에 나와 있는 조그만 손수레 책방, 미국의 작은 대학도시 헌책방 지하 서
고에서 만나는 피터 래빗은 더 큰 즐거움을 준다. 겁은 많으면서도 천성인
호기심을 어쩌지 못해 말썽을 일으키는 이 토끼 뒤에서 무뚝뚝한 얼굴의 포
터 할머니가 살짝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고 있는 게 보이는 듯하기 때문이
다. 김서정<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