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올리브에 남긴 발자욱

[일사일언] 껍데기 문화국 (이영준)


제목 : [일사일언] 껍데기 문화국...........이영준

조순 서울시장이 내건 선거공약중의 하나가 일본 동경의 20분의 1 수준
에 있는 서울의 도서관을 동경 수준으로 높이겠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어
느 정치인도 내건 적이 없는 그 공약은 정말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우리
나라 정치는 지금까지 국민들이 좀더 많은 책을 읽도록 노력하지 않는 정
도가 아니라 오히려 독서를 방해해 왔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조순시장의
도서관 공약은 우리나라 정치사상 최초의 문화적 발상이었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니다. 이제 좀 교양있는 정치인이 나왔구나 싶은 느낌을 가진 사람
이 필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공약이 조순시장 임기중에 완전히 현실화될 것을, 미안하지만, 필자
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조순시장의 그 선거 공약은 자신의 이미지를 구
축하는 데 일조를 했음에 틀림없고 필자가 그에게 투표하도록 만들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가 문화국이라고 용감하게 말하는 사람이 더
러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사람이 드물다. 국민소득 1만불시대를 맞아 단
군이래 제일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고들 하지만, 우리가 거기에 걸맞는
문화국이 아니라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의식이 족하게
되니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내년도 예산편성에서 스포츠관련 예산은 늘렸지만 도서관의 장서 구입비
는 대폭 깎았다고 한다. 도서관 예산이 하도 적으니 그중에서 도서구입비
가 차지하는 비율이 10%도 안된다는 사실, 예산의 대부분이 인건비와 건
물유지에 쓰인다는 사실을 정부가 모를리 없다. 그렇다고 국민들의 독서
환경에는 별 관심이 없어보이는 정치인들이 예산을 늘려주길 바라야 할까.

국립중앙도서관의 장서 규모란 게 미국의 대학규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책이 제일 많다는 국립중앙도서관의 사정
이 이러니 대학도서관이야 말할 것도 없다. 건물을 지어놓고 도서관이라
고 간판만 붙여 놓은 격이다. 사정이 이런데 세계화라거나 21세기는 문화
니다.<도서출판 황금가지 대표>

출처 : 조선일보 96년 09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