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서 명 : 세계화와 올바른 번역의 길
원 저 자 : 서평문화 제18집 1995년 6월
집 필 자 : 이태동
오늘날 우리들은 지구촌(地球村)이란 말을 즐겨 사용한다.
이러한 새로운 어휘를 우리가 빈번히 사용하는 것은 여러가지
첨단적인 통신수단의 발달로 말미암아 이미 지구상의 여러
나라가 먼 이국(異國)땅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공동체적인 촌락을 이루고 있는 구성적인 요소로 느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가 이렇게 축소되면 될수록 국제간의
문화적인 교류의 필요성은 더욱 더 절실해지고 문화적인 충격
또한 피할 수 없는 힘이 된다.
한 나라의 문화란 그 나라 사람들에 의해 창조되고
계승·발전된다. 그러나 그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할 것 없이
외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세계성을 띠면서 새로운 면모를
갖추고 발전해 가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때 한 나라
문화는 다른 나라의 문화에 의해 강제적으로 지배를 받아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위험성도 없지 않지만, 또 다른 한편
그것이 외부의 문화로부터 절연되거나 차단되어 폐쇄된 상태에
놓이게 되면, 그 생명력을 이어가기가 어렵다. 한 나라의
문화는 다른 모든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물 흐르듯 흘러가며
다른 나라의 문화와 교류를 하며 성숙해야만 한다. 오늘날
우리 문화가 “세계화”를 이룩해야만 한다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세계화”는 국제교류를 통해서
우리 문화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 올리자는 것이다.
그런데 악서가는 세계 여러 나라들의 문화를 우리나라 문화
속으로 유입시키거나 소개하는 작업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번역이라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잘못이
없을 것 같다. 일본 문화가 오늘날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도 번역 문화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크게 뒷받침 해 주고 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번역문화가 잘못 형성될 때, 그것은
자국(自國)문화에 이득보다는 해(害)를 주는 결과를
가져옴에는 틀림이 없다. 이를테면, 미처 검토해 볼 여유도
주지 않을 만큼 밀려오는 정보의 홍수라는 물결을 이용해서,
우리 문화에 악영향을 끼칠 저질스러운 책을 상업적인
목적으로 무책임하게 번역한다든지, 혹은 좋은 책을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날림번역이나 오역(誤譯)을 통해서
원전(原典)이 지니고 있는 사상이나 미학을 왜곡되게
전달하고, 서툴게 가져온 외래어(外來語)를 통해 아름다운
우리말을 오염시키거나 일그러뜨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번역작업의 올바른 길이 무엇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자.
첫째, 번역대상이 되는 도서를 엄격한 검토를 거쳐 선택해야만
한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번역되는 책들은 어떤
측면으로 보나, 우리 문화 전반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인류의 공동재산이나 유산으로 손색이 없는
것이어야만 한다. 물론 시장 경제를 채택하는 사회에 있어서
지나친 통제는 없어야 하겠지만, 번역에 관계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상업적인 차원을 넘어 존재한 “문화 발전에 대한
기여”라는 대 전제(前提)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만 할 것이다.
둘째, 번역을 하나의 외국어를 단순히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재창조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우리는 “번역이란
죽음이다”라는 말을 우리 주변에서 가끔 듣는다. 이러한 말은
번역이 어렵다는 말도 되겠지만, 그것은 원작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번역작업이 창조적이어야만 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다시 말하면, 어떤 정보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단순히
한나라 말을 다른 나라 말로 옮기면, 그 원본이 지니고 있는
유기적인 생명력과 느낌이 상실되는 결과를 가져오기 쉽다.
그러므로, 번역이라는 작업이 지니고 있는 창조적인 과정은
그만큼 어렵지만 절실하게 필요하다.
엄격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번역이란(특히 문학인 경우),
언어의 전환을 통한 단순한 정보의 전달 작업이 아니라,
의미깊은 재창조의 작업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독일의
유명한 번역가이자 평론가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보드레르의 「파리 풍경」을 번역한 서문(序文)에서
“번역이란 원작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만을 위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만일 어떤 번역이 단순히 “정보”나 “이야기”의
전달 기능만을 위해서 이루어 진다면 그것은 “서투른 번역의
증명서”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모든
원전(原典)이란 =쳄岵硬 요소와도 같은 “번역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번역가가 그것을 발견해서 채울 수 있을 때, 올바르고
창조적인 번역 작업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우리들에게는
별로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미국과 서구(西歐)학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하바드 대학의 세계적인 비교문학가이면서도 탁월한
번역문학가인 르나토 포기올리(Renato Poggioli)는 번역가란
유명한 작곡가가 만든 훌륭한 음악을 청중들에게 아름답고
우아하게 들려주는 연주자와도 같은 기능을 한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스쳐가지만, 훌륭한 연주자는 그 자신의
수련된 뛰어난 감각을 통해서, 자신이 연주하고 있는
악곡(樂曲)이 지니고 있는 깊은 의미와 시적인 요소를
발견하고 그것에다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그래서
우리는 카라얀이나 주빈 메타, 그리고 정경화 등과 같은
연주자를 단순히 악기와 함께 하는 기능의 보유자가 아니라
작곡가와 비견하는 예술가라고 부른다. 카루소와 마리아
칼라스 및 제시 로만 등과 같은 성악가, 로렌스 올리뷔에 같은
무대 위의 배우, 니진스키나, 이사도라 던컨 같은
무희(舞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번역작업은 기계적으로 하나의 언어로부터 다른 언어로
말을 옮기거나 바꾸는 일이 아니라, 원전에다 “낯선 옷을 입히고
변형된 형체와 새로운 정신”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그것은 무대장치를 하는 일이나, 혹은 발레에 수반하는 음악을
작곡하거나 연주하는 일, 그리고 어떤 주제를 몸짓으로 옮겨 놓은
판토마임이나 혹은 춤과 같은 것과도 비유될 수 있다.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 번역은 많은 서투른 번역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고역(苦役)스러운 기계적인 작업이 아니라, “태초(太初)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말과 같이 원초적(原初的)인 대상(對象)을 해석하는
일종의 창조적인 과정의 작업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을 어떤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하나의 언어로
옮기는 일은 번역가의 창의적인 노력과 감수성을 통해, 그 작품이
지니고 있는 예술적 의미와 가치를 확대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훌륭한 번역가는 원작이 지니고 있는 것과 다른 언어를 사용해서
그 작품이 지니고 있는 예술적인 의미와 가치를 새로운 차원에서
확대해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언어가 지닌 감각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고전(古典)과 같은 훌륭한 작품이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려면 시대에 따라, 그리고 지역에 따라
새로운 언어에 투영되어져야만 한다는 논리는 번역이라는 형식에
충분한 가치를 부여할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끝으로, 우리가 번역작업에서 얻는 문화적이고 언어적인 혜택은
번역의 대상(對象)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원작을 번역하는
바로 그 과정에서 우리말을 더욱 풍요하게 만들고 개발하는 결과를
얻는데서도 구할 수 있다. 번역을 할 때, 서두르지 않으면서
원저자에 못지 않은 예술가적인 사명을 가지고 창조적인
장인(匠人)의식을 집중시키는 사람은 언어의 내면에 불을 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밴야민 휠더린이 소포클레스의 비극 두 편을
번역한 것을 예로 들면서 “번역가는 순수언어를 위해 그 자신의
언어가 지닌 장벽을 무너뜨린다”라고 까지 말했다.
그렇다면 번역은 분명히 어떤 대상의 복사와 같은 기계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예술형식”으로 보아야만 할 것이다. 실로
훌륭한 번역가가 그의 고유한 작업을 할 때 느끼는 충동은 화가와
조각가들이 아름다운 대상을 보았을 때 화폭에 그림을 그리고 돌과
쇠붙이를 그것과 유사한 조형물(造形物)로 옮겨 놓고 싶은 충동을
가지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지 않을까.
아무튼 올바른 번역의 길은 번역가가 스스로 창조적인 예술가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하겠다. 번역가가 훌륭한 예술가의
수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그 과정이 힘겹고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올바르고 훌륭한 번역 예술이
탄생할 것이다. 훌륭한 번역은 단순한 외국문화의 전달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국(自國)문화를 세계화 시키는 총격이 될 뿐만
아니라, 자국문화 그 자체의 일부분이 됨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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