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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에 남긴 발자욱

[읽기자료] 사는 방법으로서의 독서교육


도 서 명 : 사는 방법으로서의 독서교육
원 저 자 : 서평문화 제10집 1993년 여름
집 필 자 : 이중환

<< 내용 >>
<독서교육>은 우리에게서 엄연히 존재한다. 학교교육속에 독서교육은
별도로 특별히 요구되고 있고, 95년에는 검인정교과서로 <독서>과목이
독립되어 설정된다. 중·고교에는 또 법정으로 학교도서관도 마련돼
있다. 제도적으로 말하자면 독서에 대하여 굳이 더 해야할 일이 없는
셈이다.

그러나 <독서교육>에 대해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 다시 말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고 있다. 이는 곧 독서교육의 형식은 있으나,
독서교육의 실질은 없다는 것의 반증이다. 실제에 있어 독서교육은
지금 방치돼 있다.

우선 학교도서관이라는 것이 허울좋은 명목적 거점일뿐이다. 1만
2천여 중·고교에 학교도서관 공간이나마 한쪽에 마련한 곳이 4천여개
뿐이다. 소장도서들은 또 싸구려 책을 관으로 달아 사서 권수만을
채우기에 급급한 수준이다. 이 대부분은 학교라는 이름으로서는 도저히
권해서 읽힐 수 없는 내용과 수준의 책들이다. 이나마 학생 누구가
읽고 있는가. 그렇지도 않다. 학교도서관 공간은 각 학급에서 상위
10등에 드는 학생들만 과외시간에 수험공부를 위해 입장할 수 있는
곳으로만 쓰인다. 결과적으로 학교도서관은 독서를 장려하는 이미지
로서조차 그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 교육에서는 더 심각한 현상을 만들고 있다. 독서를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독서를 참으로 지겨운 일로 느끼게 하는 교육으로 변질
시키고 있다. 도식적으로 또는 고정관념적으로 들고 다니는 몇권의
고착된 도서목록을 중심으로 이를 의무적으로 읽고 독서감상문을 써서
내게하는 방식만을 운영한다.

그러나 독서인 누구나 아다시피 책읽기는 무엇보다 책읽기로서의
즐거움과 재미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어느때는 읽기가 즐겁지만
어느때는 읽기가 즐겁지 않은 것도 자연스런 삶의 기본적인 느낌이다.
뿐만 아니라 개인별로 책읽기의 관심과 수준은 각기 다르다. 이러한
기초항목들이 고려되지 않는 책읽기교육은 책읽기를 단지 끊임없이
정답 하나를 외워야하는 화학방정식과 다름이 없는 과목으로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오늘에 있어 책읽기교육은 고전목록으로 이루어진 <위대한 책>을
주입식으로 읽혀야 한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도 않다. 서양인문
교육 전통에 근거한 <교양인>의 내용이 실은 바뀌고 있다. 이것은
마치 현대이전으로의 복귀만을 중요하게 본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따라서 독서교육은 두가지 일을 함께 해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하나는 책읽기의 즐거움을 통해서 책읽는 일을 사는 방법중의 하나로
일생동안 유지해 갈수 있도록 스스로 선택하는 것을 도와 주는 일이다.
또 하나는 변화하는 세계와 앞으로 다가오는 삶의 조건을 전망하고
이해하는 관점을 키우도록 도와야 하는 일이다.

피터 드러커(Peter F.Drucker)는 그의 최근저서 「자본주의이후의
사회」에서 이렇게 말한다.

“미래의 교육받은 사람은 글로 변화된 세상에서 살아갈 준비를



해아만 한다. 그것은 <서유럽화>된 세계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교육받은
사람은 더욱 더 종족화된 세상에서 살게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자신의
비전, 전망 그리고 정보를 가진 <세계의 시민>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교육받은 사람은 두개의 문화 - 말과 사상에 초점을
두는 <지식인(Intellectual)>의 문화와 사람들과 작업에 초점을 두는
<경영자(Manager)>의 문화 - 속에서 살아가는 동시에 일할 준비를
해야만 할 것이다 .

문제는 독서교육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있는 것만도 아니다. 일상
적인 생활 시간속에 모든 매체의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느냐에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오디오와 비디오, 그리고 고화질 TV와 유선
방송들의 발전은 피할 수 없이 가장 늙은 미디어인 도서의 사용 시간을
줄여가고 있다. 이 때문에 책읽기는 더욱 강조되지 않는 한 그 자신의
가치와 영역을 축소해 갈 수 밖에는 없는 입장이 되고 있다. 컴퓨터는
또 책이 가진 기능적 부분들을 효율적으로 흡수해 가고 있다. 백과
사전과 같은 지식들은 이미 굳이 책으로서의 백과사전을 찾아볼 이유를
없게 만들었다. 이 속에서 책은 더욱 분명하게 가장 고급스러운 인간의
정신적 행위로 남는다. 그리고 모든 여타매체들은 취향적·오락적·
감각적 매체로서 환상적인 차원을 만들어 가고 있다. 환상적인 감각과
정신적 교양의 싸움이 개개인의 내부에서 새로운 선택대상으로 변화
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지경에서 독서교육은 '그러나 나는 책을 읽겠다'라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야 한다. 과연 그럴 수 있는 교육을 우리는 지금
하고 있는가. 이것이 독서교육의 명제이다.

현재로서 그 답은 비참하다. 1989년 기준으로 우리의 학교교육에서
학교도서관 매체전문가 1인당 학생수는 국민학교 1만8천6백80명,
중학교 8천2백99명이라는 수치가 나와 있다. 이를 외국과 비교해
본다면 미국 484명, 511명, 일본 1,425명, 977명, 대만 2,397명,
1,625명이다. 극단적 사례를 비교한다면 핀란드는 150명이다.

우리에게서는 국어교육에서 마저 독서교육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국어교육도 문학작품들을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한 체험의 획득, 허구적
상상력을 통한 현실 초극의 능력 함양, 소설의 재미에 대한 이해와
이에 의한 개별적인 능동적 반응을 알도록 해야만 바른 교육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국어 교육은 오직 시험문제에 날만한 문장만을 따로
떼어내 몇개의 어휘에 대한 단하나의 해석을 암기하도록 조직된다.
이것은 국어교육이기보다는 국어사전의 단순한 읽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각한 결과는 이 과정을 통해 읽는다는 일을 참으로
지겹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실의 반영은 이미 우리 사회에 나타나 있다. 책 읽기는 지금
우리에게서 어느 연대에서보다 질적으로 낮아져 있다. 그저 흥미위주의
쉽고 가볍고 선정적인 읽을거리에만 익숙해 있다. 이런 내용들은
주간지라는 매체로 읽으면 족한것이다. 이것을 책의 형태에 담았다고
해서 독서를 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책의
형태에 있는 것은 모두 독서로 싣고 있다. 그리고 어떤책을 읽어도
독서를 했다고 믿고 있다.

책 읽기를 오늘날 새롭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러나 이런 책들을
뜻하는게 아니다.

보다 높은 수준, 즉 책을 통해 읽은 것이 개개인의 삶속에 개별적



으로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도록 하는, 그만한 가치와 자극을 줄 수
있는 것들이 읽을만한 것이고 또 읽었다고 말할만 한 것이다.

독서는 가장 높은 차원의 인간의 사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권한권이 위대하기 때문에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위대한
책인지 아닌지는 오직 읽는 개개인에게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다.
이것이 독서교육이 명심해야 할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