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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에 남긴 발자욱

[잡문] 흑산통신 96-05호 중에서

밤이 깊어갑니다. 이제 내일은 속초로 출장을 갑니다. 과정협에서 하는 세미
나에 참석을 합니다. 지난 부산 도서관대회에서 과정협의 회장님을 만나서
정보를 얻고, 회사에 이야기를 해서 이번엔 출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주제
가 디지털도서관과 관련이 있는데, 사실 전 딱 부러지게 그렇게 되어야 한
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흐름이 어떤지 알고 싶고... 어제부터
강원도 지역에 눈이 내렸다고 합니다. 아, 내일은 하얀 눈을 볼 수 있겠네
요. 지금 사진기를 가지고 갈까 생각 중입니다. 첫 눈이야 매해 오는 것이기
는 하지만, 올해는 왠지 더 마음이 끌립니다. 기대를 하면서 떠날 준비를 합
니다.

혹시, 이번 통신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셨나요? 그 동안 아주 오
랫동안 저도 잘못 알고 있었군요. 제가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려고 생각했던
부분이 바로 위 <黑山通信> 아래 있는 한자로 쓴 글입니다. "天之道, 損有
餘而補不足, 人之道則不然, 損不足以奉有餘" 이란 부분입니다. 사실 人之道...
하는 부분은 이번 통신부터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만, 이 글은 老子에 나오
는 글입니다. 그 동안은 "天地道..."라고 썼습니다. 그러나 오늘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니까 "天地道"가 아니라 "天之道"이더군요. 참 한심했습니다. 내
스스로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는 글귀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니....
혈액형을 제대로 알게 되었을 때의 심정과 비슷합니다. 중학 때부터 혈액형
이 A형이라고 해서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군에서 헌혈한다고 다시 검사하
니까 B형이라고 하더군요. 좀 당황했지요. 나중에 몇 번 헌혈을 하면서 검
사를 했더니 모두 B형이라고 하기에, 이제는 확실하게 B형이라고 믿습니다
만, 정말 처음에는 꽤 당황스럽더군요. 거의 모든 기록에는 아직도 A형이라
고 적혀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좀 스스로 위안을 삼는 것은, 天地道나 天之
道나 별 차이는 없지 않을까 하는 점이지요. 아무튼.... 无爲堂 장일순 선생
님과 이현주 목사님이 대화로 老子를 풀어간 책 <老子이야기> 하권에 보면
이 구절에 대한 해설이 나옵니다. 그 해설에 의하면 이 구절은 "하늘의 도
는 남는 것을 덜어 모자라는 것을 채우나 사람의 도는 그와 같지 않아서 모
자라는 것을 덜어 남는 것을 떠받든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가 정확
합니다. 저도 그런 의미로 이 구절을 가슴에 담고 사는 것입니다. 그 동안
잘못 적었던 점은 사과 드립니다. 정말 우리 사람들의 삶이란 것이 언제나
자연스러운 것을 벗어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점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저 자신도 여러 차례 전자도서관
등의 미래 도서관 담론을 접하면서 정말 그렇게 되는 것이 도서관의 발전이
고, 인류에 긍정적인 변화의 방향이라고 믿어 왔습니다만, 정말 그것이 사실
일까? 사실이라 하더라도 진정 그것이 진리일까? 등등의 질문을 해야 한다
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그랬다고 합니다. 온 인류가 필요한 영양만
을 섭취하는 수준의 식사를 한다면 식량이 부족하지는 않다고, 그러나 사람
은 항상 필요 이상으로 먹고 있기 때문에 식량이 모자라고, 모자란 식량 때
문에 한 쪽에서는 서로 싸우고 한 쪽에서는 굶어죽고, 한 쪽에서는 반대로
비만과 성인병으로 고생하고... 이런 것을 보면, 老子의 진단과 해결책은 너
무 단순하면서도 진리입니다. 진리를 고수할 만한 용기가 필요하겠지요.

유나바머란 책을 샀습니다. 오늘 출장비를 받았는데, 그 중에서 만원 짜리
한 장 꺼내 책 두 권을 샀고, 그 중 한 권이 바로 이 책입니다. 다른 사람들
은 책을 사면서 무엇을 보는지는 모르지만 전 이 책을 살 때, 저자부분을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책에 소개된 바로는 이렇게 되어 있더군요. 우선 '확
인저자'란 말이 있습니다. 이 책의 확인저자는 유나바머라고 되어 있습니다.
너무 유명한 이름이라 사전에도 올라있는 이름, 아마 전 세계 모든 사람들
이 들어보았을 이름이지요. 그 아래에는 또 한 명의 저자가 있는데, 그 저자
는 '추정저자'로 되어 있습니다. 데어도로 존 카진스키란 유나바머 사건의
용의자가 추청저자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정확한 표현이라는 생각입니다. 아
직 그 사람이 범인이라는 확정된 판결이 없다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분명
용의자는 아직 추정되는 범인일 분이지 범인은 아니지요. 이것을 인정하고,
우리 문제로 끌어안아 봅니다. 이럴 경우 기본표목으로 누굴 잡아야 하지
요? 유나바머인가 카진스키인가? 유나바머는 기본표목이 될 수 있는가? 만
일 카진스키를 진범으로 단정하고 그 이름을 기본표목으로 삼았다가, 나중
에라도 범인이 아닐 경우는 어떻게 할지... 쓸데없이 문제를 걸어봅니다. 유
나바머의 요구를 들어서 유명한 신문에다가 그 사람의 기고문을 실었던 것
을 직접 보았습니다. 제 너저분한 책장 어디엔가는 그 날의 기사가 다 있을
겁니다만... 이제 그것을 번역된 것으로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내일부터 전자
도서관 이야기 들으러 가면서 이 책을 가져갈 생각입니다. 균형을 맞추어
보고 싶은 때문이지요. 박영률출판사라는 곳은 특이한 기획으로 기억되는
출판사입니다. 그런 대로 좋은 내용의 책을 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왕
책 이야기를 한 김에 더 하지요. 또 다른 책은 <딜버트의 법칙> (스코트 아
담스 지음, 이은선 옮김, 홍익출판사, 1996) 이란 책입니다. 이미 미국 등지
에서는 유명한 책이란 것을 어느 시사지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서점에서
눈에 띄기에 샀습니다. 비지니스사회에서 무수한 톱니바퀴 중 하나인 샐러
리맨들의 애환을 그린 그림들이 다소 생소하기는 하지만 재미있게 설명되어
있는 책입니다. 아주 우연히, 아직 읽기를 시작하지 않았는데, 정말 우연히
펼친 면에서 보게 된 구절입니다. "나는 칸막이가 쳐진 작은 사무실 책상에
서 17년 동안 일했다. 대부분의 경영서적은 그런 공간을 충분히 겪어 보지
못한 컨설턴트나 교수들이 쓴 책들이다. 이것은 수박의 겉만을 핥아 본 뒤
수박의 맛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적어도 수박을
한두 입 정도 먹어 본 사람이다" (17쪽) 왜 이 구절이 그리도 마음에 쏙 들
어오는지... 다들 그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비판적 견해는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린 어쩌면 사무실보다 더 열악한 공간에
서 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전 매일 12층에서 지하1층의 서고까지 몇 번
이고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지내야 합니다. 도서실에 공간을 배정하지 않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배치하고는 천국에서 지옥으로 오가는 듯한 일
을 하는 곳이 가장 나은 조건의 전문도서관 중 하나라는 사실을 제대로 아
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지요. 이 만
화책 비슷한 책에도 기대를 걸어봅니다. 참, 부산에서 책을 한 권 받았지요.
지난번 부산에 가서 구하려고 했는데 못 구하고 왔거든요. 그래서 전화를
해서 돈을 보내고 책을 받았습니다. <白頭大幹縱走> 나도 그 아름다운 산
맥을 다 밟아보고 싶습니다. 결코 그런 행운이나 기쁨을 가져보지는 못하겠
지만요, 결국 책에서나 그 재미를 느낄 수 밖예요...

끝으로 오늘 책읽기를 끝낸 책에서 한 두 마디 더 잇겠습니다. 네그로폰테
의 <디지털이다>를 다 읽었습니다. 중간중간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는데, 미
래에 대한 좋은 생각거리를 제공해 주며, 참신한 아이디어를 보여주고 있습
니다. 맨 뒤 감사의 말을 적은 것을 보면, 역자도 부러워 한 점으로 40여명
이나 되는 사람들을 거론하면서 서로 협력하고 격려해 가면서 이 책을 썼음
을 밝히고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분위기를 보면서 부럽기도 했습니다.
역시 제가 고른 부분은 글쓰기에 관련한 것입니다. "이 책은 디지털 시대의
존재론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철학 용어나 전문 기술 용어를 별로
사용하지 않으면서 우리시대의 급변하는 모습을 조망한다는 데 있다. 네그
로폰테는 과학용어나 개념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일상 경험과 사례를 들어
디지털세계의 변화 모습과 핵심을 잡아내는 솔찮은 재주를 갖고 있다. 무엇
보다도 그는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컴퓨터를 대한다. 인간-컴퓨터 인터페이
스에 관한 그의 관심은 결국 차가운 금속성 기술결정주의의 무쇠로봇이 아
니라 부드러운 인간의 모습을 한 휴머니즘적 기술관을 보여준다" (228쪽).
그리고 사족 삼아 한가지 더 옮기면 "교육방식이 변화하지 않고서는 디지털
시대의 잠재력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없다. 이 책에서는 자랑스럽게도 한국
이 딱 한 번 거론된다. 무지막지한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설명하는 사례로
한국이 일본과 더불어 등장한다. 네그로폰테는 저자 서문에서도 이 점을 지
적하고 있다" (229쪽)(정확하게 말하면 내 생각에는 두 번 등장합니다. 214
쪽에 보면 맨 아래에 '페오리아의 독립 소프트웨어 디자이너가 포

(Pohang)의 상대자와 경쟁하고...라고 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 글의 논제와는 상관이 없는 문제이기는 합니다) 저자는 매우 쉬운 글쓰
기를 하고 있습니다. 정말 술술 읽을 수 있었지요. 얼마 전 읽은 우리 전공
서적에서는 왜 그리도 어려운 전문용어들이 설명도 제대로 없이, 또는 제대
로 해석되지도 않은 채 책 구석구석 박혀 있었던지... 비교가 됩니다. 쉬운
글쓰기가 마구잡이 방식이 아니라 정말 완전히 소화한 결과로 쓸 수 있는
최종적 단계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쉬운 글쓰기가 가능한 사람들은
이제 전문가들이나 학자들이 아닙니다. 바로 현장에서 변화와 함께 뒹굴고,
먹고사는 문제와 결부되어 고민하고, 싸우고, 밤새 문제와 씨름하면서 보낸
세월을 제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다른 사람들, 같은 현장의 동료
들을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통
신은 그런 실험을 하는 연습장입니다.

14일 새벽 1시쯤 되었습니다. 남들은 출장 가는 것을 부러워하던데... 산을
볼 수 있다는 점만 빼면 사실 귀찮은 일이지요. 가기 전에 뭔가 주절거리고
싶었습니다. 건강하시길... 黑山通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