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CS)
날 짜 : 97/9/8
제목: [우리문화유산기행] `천년 변색없는 종이' 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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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자호란후 품질저하...되살려 정부기록 보관에 사용해야 ##.
21세기부터는 달라질지 모르나 적어도 20세기까지의 인류문명이 종이
위에 구축되었다는 말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만일 현대생활에서 종이
를 완전히 없앤다고 상상해보자. 정부와 각종 관청, 재판소와 금융기관,
각급학교와 도서관 등의 모든 기능은 순식간에 마비될 것이다. 뿐만 아
니라 거창한 현대문명 그 자체가 폭싹 무너저버릴 것이 틀림없다. 종이
는 문명사회의 필수적인 인프라스트럭처(하부구조)라고 하지 않을 수 없
다.
무엇보다도 종이는 인류문명의 가장 나긋나긋한 기록수단이다. 종이
는 [과거]가 [현재]에 얘기를 걸어보고, [현재]가 [미래]에 말을 전하는
인간정신의 역사적 대화의 통로이다.
세계 최고의 인쇄권자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1300년의 잠에서 깨어나 우리앞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이 6백년만에 이국땅 프랑스에서 세계인의 눈
앞에 드러나게 된 것도, 아니 그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 5백년의 [실록]
이며 정도전의 [삼봉집]을 오늘에 우리가 읽어 볼 수 있는 것도 종이가
있어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냥 종이가 아니라 천년 세월을 견디면
서 삭지도 않고 썩지도 않은 뛰어난 지질의 종이가 있어 가능했던 것이
다. 그것이 곧 우리겨레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인 한지이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종이를 만들어 썼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서기 4세기 후반에 백제에서는 이미 역사서를 편찬하였다는 사실로 미루
어 빠르면 4세기경에, 그리고 서기 610년에는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에
제지기술을 전수한 사실로 미루어 아무리 늦어도 7세기 경에는 중국의
제지 기술이 우리나라에 도입됐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현재 경주국립
박물관이 보존하고 있는 신라시대의 종이로 밝혀진 [범한타라니] 한 장
이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래된 종이로 알려지고 있다. 근년에는 평양에
서 고구려의 한 유적지에서 마로 만든 종이가 발견됐다는 소식도 있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다라니경]은 닥나무껍질의 섬유를 원료로 우리
나라 고유의 제조법으로 만든 저지가 이미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음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저지, 곧 닥나무종이가 통일신라시대에 크게 발달
했다는 것을가장 확실하게 입증해주는 실물이 호암미술관 소장 대방광불
화엄경(국보 196호)이다. 경덕왕 13∼14년(서기 754∼755년)에 전남 구
례화엄사 창건 조사로 알려진 연기법사의 발원으로 만들어졌다는 이 사
경은 아무리 보아도 이것이 1천2백여년전의 종이며 그때에 적은 붓글씨
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지질과 보존상태를 자랑하고 있다.
통일신라의 저지는 다듬이질이 잘되고 섬유질이 고르고, 희고, 질겨
서 백추지(추자는 석자를 왼쪽에 중자를 오른쪽에 붙여서 만들어주세요)
라고도 불려 이미 그 당시부터 중국에서 평판이 높았다. 제지역사가인
일본의 야기(팔목길보)는 {신라의 백추지는 다른 어떤 종이와도 비교할
수없을만큼 훌륭한 종이로 중국에서까지 천하제일이라고 하여 소중히 여
겼다}고 적고 있다.
한편 [계림지]라 일컫기도 했던 신라의 저지는 지면이 매끄럽기가 명
주와 비슷해 누에실로 만든 것같다고 해서 견지라는 별칭도 있었다.
고려시대는 신라 저지의 기술적 바탕위에서 종이의 수요확대에 따른
대량생산이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에 조판한 [대장경]이나 [삼국사기] 등
여러사서의 인출은 국내적으로 종이 수요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지
에 대한 송나라, 원나라의 수입수요는 국외에서도 고려지의 대량생산을
촉발하고 있었다. [세백광활](섬세하고 희고 빛이 나고 매끄럽다)이란
고려지의 평판이 나은 필연적인 결과라 할 것이다.
중국에서는 역대 제왕의 진적을 기록하는 데에 고려지를 사 용했다고
전한다. 뿐만 아니라 중국 서화의 거장인 송의 미불, 명의 동기창도 고
려지를 즐겨 쓰고 그를 상찬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태종 15년에 국영 조지소(세종대에 조지서로 승
격)를 설치하여 제지를 관영화하게 된다. 한 기록에 의하면 조선조의 지
장은 7백5명을 헤아려 그 숫자는 당시의 각종 제조분야의 장인 총수 중
22.5%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조에 있어 제지공업의 비중을
짐작케 해주는 수치이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지녀온 한지는 적어도 조선조 초기까지는 고려지
의 성가를 이어 받아 품질에 있어서 전대의 그것에 손색이 없었다. 그래
서 그러한 지질이 뛰어난 한지는 조선시대의 사대외교에도 필수품처럼
되어 각종 조공지를 제지하느라 피폐한 농가와 조지서에 이만저만 큰 부
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외교상 화급을 다투는 조공지의 공급을 감당키
어려워지자 전국의 사찰에서 국가의 제지수효의 상당부분을 충당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의 조공지 요구는 더욱 커지고 그 압력에 따라
종이를 수탈하는 지방관아의 가렴주구도 격심해졌다. 이 모든 사정이 필
경은 한지의 품질저하를 부채질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조선조 후
기의 한지는 옛날의 고려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이미 당시에도 실학자
(정약용-박제가)들이 여러 글에서 지적하고 있다.
금세기에 들어와 국권의 상실과 광복 후의 동족전쟁, 그리고 60년대
이후의 급격한 산업화-근대화 바람은 그러잖아도 체질이 허약해진 한지
의 맥을 거의 끊어버릴만큼 빈사상태로 몰고갔다. 무엇보다도 한지의 명
을 재촉한 것은 양지에 밀린 한지수요의 격감이다. 게다가 한옥이 헐리
고 아파트가 임립하면서 창호지 장판지조차 유리와 비닐에 밀려 발붙일
곳이 없어져버렸다.
지령 천년을 자랑하던 한지-. [세백광활], 천하제일의 지질을 자랑
하던 그 한지는 이제 간데 없이 사라져버리고 책을 쓴 저자가 멀쩡하게
살아있는 데도 그가 쓴 책종이부터 누렇게 산화되어 먼지가 되어가는 오
늘날 우리들의 출판풍토-.
나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호텔에 투숙하면 호텔 마크가 있는 편지지와
편지봉투를 한장씩 모아보고 있다. 외국 일류호텔의 세백광활한 편지지
의 지질에 비해 우리나라 호텔의 그것은 아직도 [후진국]이오, [제3세계]
수준이다.
일본의 문인들한테서 편지를 받아보면 산업화-근대화가 우리보다 백
년 앞선 그네들이건만 아직도 전통적인 [화지]로 수제의 편지지 원고지
를 쓰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네 처지가 부끄러워진다.
한지를 회생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천하제일이라 남들이 상찬한 닥
나무의 백추지를 되살릴 길은 없는 것일까.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지의 수요를 회복시켜야 될 것이다.
그러자면 한지의 특장인 영구보존성을 필요로 하는 개인이나 기관이
한지의 수요를 창출해야 될 것이다.
입법-행정-사법부의 기록보관소가 거기에 앞장서주었으면 싶다. 영국
의 권위지 [더 타임스]지는 매일 1백부씩 아무리 오래 두어도 절대 빛깔
이 누렇게 바래지 않는 [로열판]을 특수지에 인쇄한다고 알려지고 있다.
대통령 표창장, 고급공무원의 인사사령장, 학위수여증 등도 한지의 잠재
적인 수요의 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자기의 작품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한국화 동양
화의 그 많은 화가들이 좀더 한지에 대해서, 좀더 한지의 질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준다면…. 그럼으로써 한지 수요가 확산된다면 우리 겨레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인 한지의 소생이 불가능한 꿈으로만 그치고 말겠는가.
<최정호·연세대교수>
============ 종 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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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부터는 달라질지 모르나 적어도 20세기까지의 인류문명이 종이
위에 구축되었다는 말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만일 현대생활에서 종이
를 완전히 없앤다고 상상해보자. 정부와 각종 관청, 재판소와 금융기관,
각급학교와 도서관 등의 모든 기능은 순식간에 마비될 것이다. 뿐만 아
니라 거창한 현대문명 그 자체가 폭싹 무너저버릴 것이 틀림없다. 종이
는 문명사회의 필수적인 인프라스트럭처(하부구조)라고 하지 않을 수 없
다.
무엇보다도 종이는 인류문명의 가장 나긋나긋한 기록수단이다. 종이
는 [과거]가 [현재]에 얘기를 걸어보고, [현재]가 [미래]에 말을 전하는
인간정신의 역사적 대화의 통로이다.
세계 최고의 인쇄권자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1300년의 잠에서 깨어나 우리앞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이 6백년만에 이국땅 프랑스에서 세계인의 눈
앞에 드러나게 된 것도, 아니 그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 5백년의 [실록]
이며 정도전의 [삼봉집]을 오늘에 우리가 읽어 볼 수 있는 것도 종이가
있어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냥 종이가 아니라 천년 세월을 견디면
서 삭지도 않고 썩지도 않은 뛰어난 지질의 종이가 있어 가능했던 것이
다. 그것이 곧 우리겨레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인 한지이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종이를 만들어 썼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서기 4세기 후반에 백제에서는 이미 역사서를 편찬하였다는 사실로 미루
어 빠르면 4세기경에, 그리고 서기 610년에는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에
제지기술을 전수한 사실로 미루어 아무리 늦어도 7세기 경에는 중국의
제지 기술이 우리나라에 도입됐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현재 경주국립
박물관이 보존하고 있는 신라시대의 종이로 밝혀진 [범한타라니] 한 장
이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래된 종이로 알려지고 있다. 근년에는 평양에
서 고구려의 한 유적지에서 마로 만든 종이가 발견됐다는 소식도 있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다라니경]은 닥나무껍질의 섬유를 원료로 우리
나라 고유의 제조법으로 만든 저지가 이미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음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저지, 곧 닥나무종이가 통일신라시대에 크게 발달
했다는 것을가장 확실하게 입증해주는 실물이 호암미술관 소장 대방광불
화엄경(국보 196호)이다. 경덕왕 13∼14년(서기 754∼755년)에 전남 구
례화엄사 창건 조사로 알려진 연기법사의 발원으로 만들어졌다는 이 사
경은 아무리 보아도 이것이 1천2백여년전의 종이며 그때에 적은 붓글씨
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지질과 보존상태를 자랑하고 있다.
통일신라의 저지는 다듬이질이 잘되고 섬유질이 고르고, 희고, 질겨
서 백추지(추자는 석자를 왼쪽에 중자를 오른쪽에 붙여서 만들어주세요)
라고도 불려 이미 그 당시부터 중국에서 평판이 높았다. 제지역사가인
일본의 야기(팔목길보)는 {신라의 백추지는 다른 어떤 종이와도 비교할
수없을만큼 훌륭한 종이로 중국에서까지 천하제일이라고 하여 소중히 여
겼다}고 적고 있다.
한편 [계림지]라 일컫기도 했던 신라의 저지는 지면이 매끄럽기가 명
주와 비슷해 누에실로 만든 것같다고 해서 견지라는 별칭도 있었다.
고려시대는 신라 저지의 기술적 바탕위에서 종이의 수요확대에 따른
대량생산이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에 조판한 [대장경]이나 [삼국사기] 등
여러사서의 인출은 국내적으로 종이 수요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지
에 대한 송나라, 원나라의 수입수요는 국외에서도 고려지의 대량생산을
촉발하고 있었다. [세백광활](섬세하고 희고 빛이 나고 매끄럽다)이란
고려지의 평판이 나은 필연적인 결과라 할 것이다.
중국에서는 역대 제왕의 진적을 기록하는 데에 고려지를 사 용했다고
전한다. 뿐만 아니라 중국 서화의 거장인 송의 미불, 명의 동기창도 고
려지를 즐겨 쓰고 그를 상찬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태종 15년에 국영 조지소(세종대에 조지서로 승
격)를 설치하여 제지를 관영화하게 된다. 한 기록에 의하면 조선조의 지
장은 7백5명을 헤아려 그 숫자는 당시의 각종 제조분야의 장인 총수 중
22.5%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조에 있어 제지공업의 비중을
짐작케 해주는 수치이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지녀온 한지는 적어도 조선조 초기까지는 고려지
의 성가를 이어 받아 품질에 있어서 전대의 그것에 손색이 없었다. 그래
서 그러한 지질이 뛰어난 한지는 조선시대의 사대외교에도 필수품처럼
되어 각종 조공지를 제지하느라 피폐한 농가와 조지서에 이만저만 큰 부
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외교상 화급을 다투는 조공지의 공급을 감당키
어려워지자 전국의 사찰에서 국가의 제지수효의 상당부분을 충당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의 조공지 요구는 더욱 커지고 그 압력에 따라
종이를 수탈하는 지방관아의 가렴주구도 격심해졌다. 이 모든 사정이 필
경은 한지의 품질저하를 부채질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조선조 후
기의 한지는 옛날의 고려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이미 당시에도 실학자
(정약용-박제가)들이 여러 글에서 지적하고 있다.
금세기에 들어와 국권의 상실과 광복 후의 동족전쟁, 그리고 60년대
이후의 급격한 산업화-근대화 바람은 그러잖아도 체질이 허약해진 한지
의 맥을 거의 끊어버릴만큼 빈사상태로 몰고갔다. 무엇보다도 한지의 명
을 재촉한 것은 양지에 밀린 한지수요의 격감이다. 게다가 한옥이 헐리
고 아파트가 임립하면서 창호지 장판지조차 유리와 비닐에 밀려 발붙일
곳이 없어져버렸다.
지령 천년을 자랑하던 한지-. [세백광활], 천하제일의 지질을 자랑
하던 그 한지는 이제 간데 없이 사라져버리고 책을 쓴 저자가 멀쩡하게
살아있는 데도 그가 쓴 책종이부터 누렇게 산화되어 먼지가 되어가는 오
늘날 우리들의 출판풍토-.
나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호텔에 투숙하면 호텔 마크가 있는 편지지와
편지봉투를 한장씩 모아보고 있다. 외국 일류호텔의 세백광활한 편지지
의 지질에 비해 우리나라 호텔의 그것은 아직도 [후진국]이오, [제3세계]
수준이다.
일본의 문인들한테서 편지를 받아보면 산업화-근대화가 우리보다 백
년 앞선 그네들이건만 아직도 전통적인 [화지]로 수제의 편지지 원고지
를 쓰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네 처지가 부끄러워진다.
한지를 회생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천하제일이라 남들이 상찬한 닥
나무의 백추지를 되살릴 길은 없는 것일까.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지의 수요를 회복시켜야 될 것이다.
그러자면 한지의 특장인 영구보존성을 필요로 하는 개인이나 기관이
한지의 수요를 창출해야 될 것이다.
입법-행정-사법부의 기록보관소가 거기에 앞장서주었으면 싶다. 영국
의 권위지 [더 타임스]지는 매일 1백부씩 아무리 오래 두어도 절대 빛깔
이 누렇게 바래지 않는 [로열판]을 특수지에 인쇄한다고 알려지고 있다.
대통령 표창장, 고급공무원의 인사사령장, 학위수여증 등도 한지의 잠재
적인 수요의 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자기의 작품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한국화 동양
화의 그 많은 화가들이 좀더 한지에 대해서, 좀더 한지의 질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준다면…. 그럼으로써 한지 수요가 확산된다면 우리 겨레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인 한지의 소생이 불가능한 꿈으로만 그치고 말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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