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내가 읽은 책인데, 시간과 공간이라는 문제가 과연
나에게 어떤 문제인가를 생각케 해 준 책이다.
문화일보에 실린 서평.
날 짜 : 97/6/4
제목: <서평>이진경의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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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기말을 맞아 방황과 모색을 거듭하고 있는 서구 지성계에서 시간-공간과
근대성의 문제는 주요한 주제 목록들 중의 하나로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들이 제3세계에 도달하는 속도 또한 서구의 주도에 의
한 정보화와 지구화의 영향으로 이전에 비해 훨씬 더 빨라지고 있다. 서구
이론 도입의 효과가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간에 한국의 주류 학계는 서구
의 이런한 지적 동향에 대하여 다소는 무심하고 초연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근대적 주체의 삶의 양식이란 관점에서 근대의 사회적 시간
과 공간의 특질이 갖는 의미를 해명하고자 하는 이 책의 문제의식이 돋보인
다고 할 수 있다. 크게 보면 이 책은 1980년대 후반 무렵까지 지배적이었던
마르크스주의 변혁 이론을 대신하면서 점차 영향력을 확장해가고 있는 탈
근대(Postmodern)이론의 범주에 속해 있다.
이 책을 쓴 이진경씨는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등의 저서를
펴낸바 있으며 최근에는 ‘철학의 탈주’‘탈주의 공간을 위하여’ 등의 책
을 통해 한국 사회에 대한 정연한 사회학적 잣대를 들이댄 바 있다. 시·공
간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의 의의를 강조하는 저자에 대해 그것이 단순한 하
나의 수사에 불과하지 않는가라는 의구심을 종내 떨쳐 버릴 수 없는 것도
이러한 점에서 일 것이다. 대신에 이 책은 주로 유럽, 특히 프랑스 철학
자들의 논의를 중심으로 인문학과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 전반에 걸친 방대
한 주제들을 섭렵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공간의 주제와 관련하여
이 책이 동원하고 있는 이론적 자원은 다분히 선택적이고 제한적이다. 이는
저자가 설정한 근대성(Modernity)의 해명이라는 문제의식에 비추어 납득될
수 있는 전략이다. 그러나 그것이 구사되는 방식은 때때로 일관성과 체계
성 및 정합성을 결여하고 있다. 중심을 이루는 6장에서의 논의를 예외로
한다면 역사학자가 사료를 다루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론들이 다루어지
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이때문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 책은 다분히
난해하고 현학적이다. ‘배치’나 ‘기계’와 같은 일상적 용어들이 대중
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과 다른 차원에서 정의되면서 사용되는 것
은 그렇다 치더라도, 논의의 복잡함에 가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으로 대
표되는 두 고전적 전통의 대립, 즉 양과 질, 순환과 직선, 가역성과 불가역
성에 관한 시간의 기본 줄기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나아가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시공간 이론들에 대
한 논의가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라는 궁극적
인 물음일 것이다. 또는 ‘자본주의적 배치’의 양상 등은 저자의 논지를
입증하기 위한 단순한 소재로서 동원될 따름이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근대적 삶에 대한 사유와 그로부터 탈주선을 그으려는 시도’는 저자의
다른 저서들에서도 그러하지만 아직 명확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
답과 처방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근대의 기획 중의 일부라고 한다면 더 이
상 할 말이 없지만 1980년대 전반의 급진주의 이론가들이 그러했듯이 ‘탈
주의 철학’을 통하여 저자는 암울한 현실을 차라리 초월해 버리기 위한 ‘
철학의 탈주’를 시도하는 것일까?
이 책이 근대적 시간과 공간의 인식에서 수동적 측면만을 일방적으로 부각
시키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저자 자신이 짐짓 무시하고 있는 듯
이 보이지만, 서로 다른 집단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시간을 인식하고 조직하
는가라는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여 왔던 1960년대 이래 서구, 특히 미국에
서 발전한 시간사회학(Sociology of Time)의 이론에서 오히려 배울 바가 있
는지도 모른다. 비록 그것이 장기적 구조의 맥락에 시간을 위치시키는 데
는 실패했다 하더라도 사회 구조를 만들어 나가고 유지하며 변화시켜 나가
는 주관적이고 능동적인 시간지향을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 근대성의 수동
적이고 적응적 측면에 대한 강조의 기저에는 현실에 대한 관조와 회의와 나
아가서는 체념의 태도가 깔려 있지 않을까? 여기서 하나의 역설이 나타나
는데, 그것은 이러한 근대성에 대한 짙은 회의가 그것에 대한 강한 집착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서 근대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사실상 근대주의로 귀착할 가능성을 낳는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이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전형적 비판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
는 것이다.
…김경일:정문연 사회학교수, 평자는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주요논문으로 ‘근대과학의 “보편주의”와 서구중심주의
를 넘어서’ ‘한국 근현대사에서 근대성의 경험과 근대주의’등이 있으며,
저서로 ‘일제하 노동운동사’‘이재유 연구’ 등이 있다.
============ 종 료 ========
나에게 어떤 문제인가를 생각케 해 준 책이다.
문화일보에 실린 서평.
날 짜 : 97/6/4
제목: <서평>이진경의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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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을 맞아 방황과 모색을 거듭하고 있는 서구 지성계에서 시간-공간과
근대성의 문제는 주요한 주제 목록들 중의 하나로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들이 제3세계에 도달하는 속도 또한 서구의 주도에 의
한 정보화와 지구화의 영향으로 이전에 비해 훨씬 더 빨라지고 있다. 서구
이론 도입의 효과가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간에 한국의 주류 학계는 서구
의 이런한 지적 동향에 대하여 다소는 무심하고 초연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근대적 주체의 삶의 양식이란 관점에서 근대의 사회적 시간
과 공간의 특질이 갖는 의미를 해명하고자 하는 이 책의 문제의식이 돋보인
다고 할 수 있다. 크게 보면 이 책은 1980년대 후반 무렵까지 지배적이었던
마르크스주의 변혁 이론을 대신하면서 점차 영향력을 확장해가고 있는 탈
근대(Postmodern)이론의 범주에 속해 있다.
이 책을 쓴 이진경씨는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등의 저서를
펴낸바 있으며 최근에는 ‘철학의 탈주’‘탈주의 공간을 위하여’ 등의 책
을 통해 한국 사회에 대한 정연한 사회학적 잣대를 들이댄 바 있다. 시·공
간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의 의의를 강조하는 저자에 대해 그것이 단순한 하
나의 수사에 불과하지 않는가라는 의구심을 종내 떨쳐 버릴 수 없는 것도
이러한 점에서 일 것이다. 대신에 이 책은 주로 유럽, 특히 프랑스 철학
자들의 논의를 중심으로 인문학과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 전반에 걸친 방대
한 주제들을 섭렵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공간의 주제와 관련하여
이 책이 동원하고 있는 이론적 자원은 다분히 선택적이고 제한적이다. 이는
저자가 설정한 근대성(Modernity)의 해명이라는 문제의식에 비추어 납득될
수 있는 전략이다. 그러나 그것이 구사되는 방식은 때때로 일관성과 체계
성 및 정합성을 결여하고 있다. 중심을 이루는 6장에서의 논의를 예외로
한다면 역사학자가 사료를 다루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론들이 다루어지
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이때문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 책은 다분히
난해하고 현학적이다. ‘배치’나 ‘기계’와 같은 일상적 용어들이 대중
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과 다른 차원에서 정의되면서 사용되는 것
은 그렇다 치더라도, 논의의 복잡함에 가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으로 대
표되는 두 고전적 전통의 대립, 즉 양과 질, 순환과 직선, 가역성과 불가역
성에 관한 시간의 기본 줄기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나아가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시공간 이론들에 대
한 논의가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라는 궁극적
인 물음일 것이다. 또는 ‘자본주의적 배치’의 양상 등은 저자의 논지를
입증하기 위한 단순한 소재로서 동원될 따름이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근대적 삶에 대한 사유와 그로부터 탈주선을 그으려는 시도’는 저자의
다른 저서들에서도 그러하지만 아직 명확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
답과 처방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근대의 기획 중의 일부라고 한다면 더 이
상 할 말이 없지만 1980년대 전반의 급진주의 이론가들이 그러했듯이 ‘탈
주의 철학’을 통하여 저자는 암울한 현실을 차라리 초월해 버리기 위한 ‘
철학의 탈주’를 시도하는 것일까?
이 책이 근대적 시간과 공간의 인식에서 수동적 측면만을 일방적으로 부각
시키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저자 자신이 짐짓 무시하고 있는 듯
이 보이지만, 서로 다른 집단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시간을 인식하고 조직하
는가라는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여 왔던 1960년대 이래 서구, 특히 미국에
서 발전한 시간사회학(Sociology of Time)의 이론에서 오히려 배울 바가 있
는지도 모른다. 비록 그것이 장기적 구조의 맥락에 시간을 위치시키는 데
는 실패했다 하더라도 사회 구조를 만들어 나가고 유지하며 변화시켜 나가
는 주관적이고 능동적인 시간지향을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 근대성의 수동
적이고 적응적 측면에 대한 강조의 기저에는 현실에 대한 관조와 회의와 나
아가서는 체념의 태도가 깔려 있지 않을까? 여기서 하나의 역설이 나타나
는데, 그것은 이러한 근대성에 대한 짙은 회의가 그것에 대한 강한 집착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서 근대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사실상 근대주의로 귀착할 가능성을 낳는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이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전형적 비판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
는 것이다.
…김경일:정문연 사회학교수, 평자는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주요논문으로 ‘근대과학의 “보편주의”와 서구중심주의
를 넘어서’ ‘한국 근현대사에서 근대성의 경험과 근대주의’등이 있으며,
저서로 ‘일제하 노동운동사’‘이재유 연구’ 등이 있다.
============ 종 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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