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인(藏書印)과 장서표(藏書票)
이 양 재(李亮載)
아래의 글은 1993년 11월 16일 "한국애서가클럽" 발행의 <세계의 장서표>
p.p.54∼59에 게제한 글이다.
인장의 원류
문화사학적 측면에서 볼 때 인장(印章)의 원류는 아시아 대륙의 동과 서, 즉
고조선을 포함한 극동지역과 쉬메르 문명이 발생하고 전파된 중동지역으로 지목
된다.
극동지역은 한자문화권으로 초기에는 사용형태가 인화문(印花紋) 또는 봉니
(封泥)의 용도로 나타나며, 차차 문자체(서체)의 변천과 정립에 맞물려 문자 중
심의 인장으로 확립되어 전각예술이라는 독특한 예술분야론 형성하여 나가게 된
다.
반면에 중동지역은 설형문자권으로 초기에는 인장의 사용(使用) 형태가 주로
봉니의 용도로 나타나며, 초기의 원통형 인장이 동부 유럽으로 전파되어, 고대
로마제국시대에 이르러서는 반지 형태의 장신구를 겸한 휴대와 실용이 간편한
인장(seal)으로 까지 변형되어 내려가게 된다. 이러한 로마제국시대의 인장 사용
풍습은 그 후 유럽 각지로 퍼져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봉인 관습을 낳았고,
이는 중세(中世)에 와서는 장서표의 형태로 변천되더니 근래에 와서는 우표의
형태를 모방한 씰(예를 들어 X-mas seal)로 까지 발전한다.
인장의 의미와 세습
아시아 대륙의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古代)에는 인장은 단군신화의 천부인(天
符印)의 예에서 엿볼 수 있듯이 하늘로 부터 주어진(천부적인) 권능과 권위를
상징하였다. 따라서, 고대에 있어서 인장은 군왕이나 토호 또는 지배세력 수장들
의 전유물로서 일종의 통치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
이다.
이러던 것이 중국에서는 늦어도 당나라 시대를 전후로 하여, 우리 민족에 있
어서는 늦어도 고려시대 중기에 들어 오면서 사회의 지배층 또는 지식층 사이에
공용(共用)이 아닌 사용(私用)으로서의 인장이 등장하게 된다.
당시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관인(官印: 共用)은 후임자나 후계자에게 이전
되는 세습적인 성격이 강했으므로, 자연히 그러한 세습적인 성격이 사용(私用)의
인장에도 나타나 "김씨(金氏)" 또는 "이씨(李氏)"라고만 새긴 청동인들이 고려후
기에 상당수 만들어진 것이 전존유물로 입증되고 있다.
장서인의 등장
사용의 인장이 서화가들에 의하여 작가명을 나타내고 그 작가의 작품임을 증
명하는 낙관의 용도로 쓰여지기 시작한때는 중국에서는 남송시대, 우리나라에서
는 고려후기 부터로 추정되지만 조선초기에 와서야 서화에 낙관하는 풍습이 보
편적으로 정착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한편,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장서인이 날인되어 있는 것은 고려 고종(1214∼
1259년 재위)시에 재조판 팔만대장경을 제작하는데 활동한 "수기(守其, 13C)"스
님이 「대방광불화엄경(주본) 권6」에 찍어 놓은 "해동사문수기장본(海東沙門守
其藏本)"이란 인기인데, 이를 보면 인장이 장서인으로 등장한 시기는 고려 중기
부터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인기(印記) 이후 조선조 개국 초기에 이르기까지
찍혀진 장서인이나 소장인은 불과 1∼2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눈에 띄지가 않는
라.
하지만, 조선초기 세종조에 활약했던 남지(南智)나 정인지(鄭麟趾: 1396∼1478
년)등이 사용(使用)의 인장을 소장본에 찍어 놓은 예가 발견되고 있는 것을 보
면, 늦어도 조선초기에는 장서인으로 장서표시를 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갔던 것
을 알수가 있다.
어쨌든 현존하는 임란(1592년)이전 본 고서들 가운데 장서인이 찍혀진 것을
발견하기란 매우 드믈고, 대개의 경우 임란이후본 고서들 가운데서 장서인이 찍
혀진 책들이 비교적 흔하게 발견된다.
자필서명과 장서인표
우리나라에 있어서 장서인이 등장하기 이전에 그리고 서양에 있어서 장서표
가 등장하기 이전에, 또한 지금도 흔히 행하여 지고 있는 보편적인 장서표시는
소장자의 자괼서명(sign)이나 소장처의 기입이다. 따라서, 근래의 상서표 가운데
는 소장자가 자필 서명을 하거나 장서인을 날인할 수 있는 여백을 비어 놓은 것
들도 있다. 이러한 원초적인 장서표시가 발전하여 장서인과 장서표는 그 본질이
같으면서도 서로를 구분짓는 각기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장서인은 책의 지면에다 직접 찍으며, 장서표는 별도의 종이에 장서 표시
를 만들어 붙이는데, 이것은 절대적인 구분특징이 된다. -장서인은 주로 문자로
구성된 경우가 대다수이고, 장서표는 주로 회화를 중심으로 구성된 경우가 대다
수이나 이는 절대적인 구분특징이 되지를 못한다.
그렇다면, 장서인을 별도의 종이에 찍어 장서에 붙일 경우 이 역시 장서표로
볼수가 있겠는가? 필자는 이러한 경우에도 역시 장서표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본
다. 그러나, 현대 또는 근대적 의미에서의 장서표와 구분되어야 하므로 일단은
장서인표(藏書印票)로 정의하고자 한다. 이러한 장서인표의 사용은 19세기 후반
과 20세기 초반에 생존하였던 인물들 특히 서예가이자 전각자였던 '김태석(金台
錫, 號惺齊: l875--1952)' 등의 장서에서 일부 발견된다. -또한, 조선시대에 발행
된 각종의 옥책문(玉冊文)의 말미에 별지에 찍은 인장이 첨부되어 있으며 이것
도 장서표의 성격과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인장의 용도
'오세창(吳世昌: 1864∼1953년)'이 채록하여 집성한 <근역인수(槿域印藪)>를
살펴보면 <ㅇㅇ藏書), 또는 <ㅇㅇ讀本>하는 식의 뚜렷하게 장서인임을 알아 볼
수 있는 인기(印記)는 얼마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인장의 용도는 오늘날보다는 협소하여 대개의 경우 ①공문
서 또는 분재기등에 증명을 나타내기 위하여 쓰거나, ②서화에 작자표시를 나타
내기 위하여 쓰였고, ③소유권이나 감상의 이력을 표시하기 위한 용도로 주로
쓰였다. 즉 계약문서등에서 인장이 쓰이기 시작한 연대는 1890년대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증대되면서 정착된 현상인 것이다.
따라서, <근역인수>>에 등장하는 대개의 낙관은 자신이 쓰거나 그린 작품에
날인하는 용도가 아니면, 자신의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한 소장인(서화에 사용)이
나 장서인(서책에 사용) 또는 감상인인 것이다. 즉 특정한 서화가들의 낙관용 인
장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소장인이나 장서인, 감상인으로 보아도 무방한 것이
며, 실제로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7년)인 경우에도 장서인이 별도로 있
기는 하였으나 낙관용 인장을 장서인으로도 사용하였다. -그러면서도 재미있는
사실은 추사와 그 주변인물(특히 제자)들은 거의 모두가 장서의 뜻이 새겨진 장
서인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인면(印面)과 인문(印文)
어쨌든 조선시대에 사용된 인장은 날인되는 인면(人面)의 외모적 특성에 따라
방형(方形) 장방형(長方形) 원형(圓形)등의 일반적인 형태를 지닌 것과, 종(種)
정(鼎: 솥) 병(甁) 향로(香爐) 호로(胡虜), 매화(梅花)] 반달(半月) 초생달 투호(投
壺) 주전자 고전(古錢) 거북이(龜形) 등등의 물형(物形)에 인문(印文)이나 인문
(印紋)이 들어가도록 도안된 것이 있다.
이러한 인면에 새겨진 인문(印文)은 자(字) 호(號) 본관, 성명, 간단한 약력,
그림, 문장(文章) 등등 다양하며, 인문의 서체도 전서, 예서, 행서, 해서, 초서, 갑
골문체 등등이 있다.
그러므로, 인면의 물형에 인문(印文)이나 인문(印紋)이 어우러져 전각예술의
한 형태가 성립된다.
맺음말
장서인이나 장서표는 모두 장서표시라는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 장서인
이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서 보편적인 장서표시였다면, 이제 향후의 세대들에게
는 장서표가 보편적인 장서표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수백년간 전해져온 고서일수록 지을 수 없는 훼손을 입히지 말고, 항시
교체시킬 수 있는 장서표가 사용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비록 장서표가 서구에서
시작되고 발전하여 왔으나 우리 조상들의 장서인이나 장서인표의 정신을 발전적
으로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장서표로 인식하여야 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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