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오랜만에 코엑스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갔다. 갈 생각은 없었으나 학생들과 함께 오전부터 전시회를 관람하던 아내가 카메라 배터리도 필요하다고 하고, 마침 하늘도 갑작스레 어두워지면서 비가 오시기 시작해서 우산도 가져갈 겸.. 그리고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아 바람이라도 쐬야 한다는 핑계를 만들어 코엑스에 갔다.
국내 최대 미술품 거래마당인 '한국국제아트페어 2008'이 그 전시회다.(사)한국화랑협회가 주최하는 국제적인 미술품 거리시장으로9월 19일부터 23일까지 닷새간코엑스 태평양홀과 인도양홀에서 열리고 있다. 올해로 7회째라고 하는데, 사실 처음 가 보았다. 일단 규모에 좀 놀랐다. 국제도서전 크기의 전시장을 가득 메운 그림들... 전세계 20개국의 갤러리 218개(국내는 116개)가 참여해서 무려 6천여점의 미술품을 전시하고 직접 판매도 하는 대형 페어였다. 이번 페어에는 앤디 워홀, 장샤오강, 마크 퀸, 이우환, 박서보, 구본창, 원성원의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사실 너무 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한 곳에 모여있다보니 나중에는 작품을 보기에도 힘이 들었다.
관람료가 무료인 줄 알고 갔더나 나처럼 아예 그림을 살 생각은 없이(사실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능력이 없는 것일 수 있다) 그림만 보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일까? 관람료가 무려 1만5천원이나 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이왕 나선 길이니 그냥 표를 사고 들어갔다. 이번 행사를 조직한 측에서는 닷새 동안 7만5천여명이 참관을 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고, 2천만달러(우리돈 약 225억2천만원)어치의 미술품 거래가 성사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는 보도를 봤는데, 7만 5천명이 낸 관람료만 해도 얼마가 될까? 몇 억원은 될 것이다. 이런 대중적 행사를 진행하는데 있어 비용의 문제는 늘 큰 고민거리라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아무튼 결코 저렴한 전시회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어가 보니 주말이라서 그렇겠지만 정말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참여한 화랑에서 작품을 사진 찍도록 해서 사람들은 좋은 작품들을 찾아 사진찍기에 바쁜 것 같았다. 물론 일부 화랑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하기도 했다.
나야 세계에서 유명한 화가들이 누군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유명한 작품들도 여럿 볼 수 있었다. 가격표가 붙어 있는 작품들도 있었는데.. 수 억원을 붙여둔 작품도 있었고, 몇 십 만원에서 몇 백만원짜리 작품도 많이 볼 수 있었다. 현장에서 작품을 직접 구입해서 바로 포장해 가는 것 같기도 하고, 화랑 관계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은 참여한 다른 화랑 관계자들이나 작가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모습에서 활발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림을 배우는 학생들도 많이 보였다. 나는? 그저 모양새만 무슨 화가 같이 보이지만(수염을 기른 화가들이 적지 않아서 그런지, 수염을 기른 내가 사진기 들고 다니니까 가끔씩 화가인 줄 알고 편하게 대해주는 곳도 있었다..수염 길러 성공한 것이라고 할까?)그림을 그릴 줄 모르는 문외한은 그저 달리품 팔면서 눈요기만 했다. 아내가 전해 준 학생의 말이 실감났다. 다리는 아프지만 눈은 만족한다고 했다고 한다. 그 친구들이야 그림을 배우는 학생이니까 이토록 다양한 작품을 한 곳에서 본다는 것은 너무도 신나는 일일 것이다. 물론 나도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솔직히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많은 작품 중 내가 살 수 있는 것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좋은 것은 너무 비싸서 도저히 살 수가 없으니, 그저 피곤한 눈과 마음에만 담아가야 한다는 현실에서 조금은 씁쓸했다.
너무 많은 작품을 봐서 뭘 봤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래도 2만 5천원짜리 도록을 사 왔으니 나중에 펴 볼 요량이다. 그림을 잘 모르는 내가 봐서는 전통적인 회화 보다는 이젠 다양한 재료를 가지고 '작업'을 한 작품이 많다고 생각했다. 과연 미술은 어디까지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모르겠다. 그걸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다양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고, 그 결과 미술은 더 많은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접점을 찾아가는 것 같다. 또한 중국작가들의 작품도 많이 들어와 있어 최근 신흥 시장으로서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평소 뉴스 등에서 본 적이 있어 익숙한 작품도 많았다. 그만큼 우리나라 화랑에서도 중국 작가들의 작품은 인기가 있는가 보다. 그나저나 우리 집안 아저씨 그림은 볼 수가 없었다. 요즘 위작 시비가 워낙 심해서 그런 것일까? 한 화랑은 전시장 가운데에 높은 전망대를 설치해 놓고 올라가서 전시장 전체를 조망해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나도 올라가 봤다. 색다른 재미다. 멀리서 볼 때 전체를 볼 수 있다고 했는데,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세세한 그림은 사라지고, 전체가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채워지면서 그림이 아니라 ucc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림은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고 봐야하는 걸까?
아픈 다리를 끌고 겨우 몇 번 쉬면서 몇 시간을 돌아다녔다. 그림들은 제 나름의 의미를 담고 웃고 있거나 화를 내고 있거나 관객을 놀리거나, 아니면 어둠 속에 숨어 버리거나, 팔려서 포장되어 어디론가 가 버리거나, 사람들이 찍어대는 사진기 속으로 빨려들어 가지 않으려고 벽에 꼭 붙어 있거나, 아니면 아예 도전적으로 사람들을 향해 뛰쳐 나올 듯 노려보기도 한다. 너무 많은 것을 한 번에 보는 것은 역시 무리다.. 이런 속에서 보물을 찾아낸 사람이 있겠지.. 그들을 부러워 해야겠다. 겨우 출구를 찾아 전시장을 나오니 오후에 내리던 비는 그쳤다. 전시장 안에서 본 세상은 비가 온 서울은 아니었다. 마치 스타게이트를 통해 다시 지구 위 대한민국 서울로 돌아온 기분으로 코엑스를 빠져 나왔다.
* KIAF 2008 홈페이지는 -> 여기
* 요즘 미술계는 미술품 거래에 세금을 부과하는 문제에 대해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개인이 미술품을 팔 경우 생기는 이익에 대해서 세금을 물리는 세제개편안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러한 제도는 이미 1990년 입안되었지만 아직 미술계의 반발로 확정되지 못한 것이다. 최근 정부가미술시장이 호황을 맞아 개인이 고가의 미술품을 사고 파는 과정에서 큰 이익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세금을 부과하겠다고 나섰는데, 미술계는 과세를 하면 거래가 위축될 것이고 이는 미술시장의 침체로 이어질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 어느 쪽 입장이 더 설득력 있는지를 잘 모르겠지만 KIAF를 본 결과로는 미술품 거래시장이 크기는 큰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경향신문>이 9월 16일자 신문에 한국조세연구원 전병목 연구2팀장과 한국화랑협회 강효주 KIAF(한국국제아트페어)운영위원(필립강갤러리 대표)의 찬반토론 내용을 실었다.관심이 있으면 한 번 읽어볼만 하다. (신문기사 원문은-> 여기)
한 편 <컬쳐뉴스>는 2007년 연말 문화예술계 10대 뉴스를 선정하면서 최근 급격하게 성장한 미술시장의 문제점을 짚은 기사를 게재한 바 있다. 미술계에서는 지난(2007년) 10월 4000억 원대로 추정하던 올 한해 미술시장 규모를 최근 들어 1조원에 달하는 규모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2005년 하반기부터 미술시장이 활황세로 돌아서기 이전에 비해 적게는 3배, 많게는 5배 가량 커진 규모라는 것이다. 미술시장에 관심이 있으면 역시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다. (원문은 ->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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