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나 예술은 순간적인 돌파가 필요하다. 이번에 그동안 좋은 세계문학전집을 만들어 온 민음사가 전집 200권 돌파를 기념해서 아주 새롭고 또 매력적인 책을 만들었다. 그동안 나온 200권의 문학책 중에서 10권을 선정해서 우리나라 대표적인 스타 디자이너들이 새롭게 책을 만들어 낸 것이다. 10권 한 세트 보급판..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아래에 옮긴 바 <디자인정글> 잡지에서 보고, 바로 샀다.. 그냥 보는 것으로도 즐겁다. 책 하나 하나가 별도로 포장되어 있어 아예 내부 포장은 뜯지도 않았다. 정말 책 그 자체를 넘어 하나의 예술품이 되어가고 있다. 이번에 디자인정글 홈페이지에 이 책에 대한 기사가 게재되었기에, 비영리 목적에 출처를 밝히는 조건으로 내 블로그에도 그 내용을 그대로 가져왔다. 보는 것으로도 마음을 편하게 하는 책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번 보급판이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고맙다.
출처 : 디자인정글 홈페이지
<디자인정글> 기사
민음사가 세계문학전집 200권 돌파를 기념으로 국내 스타 디자이너들과 함께 특별판을 제작했다. 정병규, 안상수, 이상봉 등 국내를 대표하는 스타 디자이너들이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독자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 10권을 새롭게 디자인한 것. | |
한국 북디자인의 새 역사를 쓰다 | |
민음사가 세계문학전집 200권 돌파를 기념으로 국내 스타 디자이너들과 함께 특별판을 제작했다. 정병규, 안상수, 이상봉, 이돈태, 박훈규, 박우혁, 박진우, 박시영, 김한민, 그리고 슬기와 민 등 국내를 대표하는 스타 디자이너들이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독자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 10권을 새롭게 디자인한 것. 판형과 종이, 편집과 제책 등 디자인 전 과정에 있어 어떠한 제약도 두지 않고 해당 디자이너의 디자인 세계를 완벽에 가깝게 담아낸 이번 세계문학전집의 특별판은, 읽는 책을 넘어 ‘보는 책’으로의 진화의 한 예로서, 국내 북디자인 역사의 사건이 되기에 충분하다. 에디터 | 이상현(shlee@jungle.co.kr), 사진 | 스튜디오 salt, 자료제공 | 민음사 |
거미여인의 키스 by 김한민 <혜성을 닮은 방>, <유리피데스에게> 등을 펴내며 그래픽노블 작가로 성장하고 있는 김한민이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를 새롭게 창조했다. 그는 “독자가 책을 읽으며 마치 연극 한 편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 좋겠다는 발상”으로부터 디자인 컨셉트를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리서치를 통해 그 면면을 발전시켰는데, 실제 동성애자들과의 수 차례 인터뷰를 통해 주인공 캐릭터를 잡아갔고, 푸익이 자주 드나들었던 1990년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구식 영화관과 바벤코 감독의 1985년 작 영화를 참고하여 전체 분위기를 떠올렸다. 고전적인 느낌의 흰 천을 입히고 거친 라인 드로잉으로 주인공을 형상화한 일러스트의 표지, 연극 무대와 감방을 동시에 상징하는 검은 틀의 느낌을 입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책 면의 먹장 처리, 따로 가위 선을 추가하여 독자들의 기호에 따라 제거할 수도 있도록 제작한 삽지 형식 등이 눈에 띈다. |
햄릿 by 슬기와 민 듀오 디자이너 슬기와 민은 <햄릿>이 지닌 고전 문학으로서의 권위를 의도적으로 무시함으로써 판에 박힌 해석을 거부했다. 작품의 시대적, 문화적 배경은 물론 상징적 의미마저도 배제한 채, 마치 전화번호부처럼 기능적 토대 위에서 <햄릿>을 디자인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흔히 통용되는 명조체를 탈피하고 고딕 느낌의 ‘햄릿 서체’를 직접 개발해 사용했다. 타이포그래피를 근간으로 단행본, 웹사이트, 출판물 등의 디자인과 왕성한 전시 활동을 펼치며 디자인과 현대 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슬기와 민의 아이덴티티를 구체화 한 것이다.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by 박훈규 국내 정상의 영상 디자이너로 손꼽히는 박훈규는, 마치 베르테르라는 한 가수가 부르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노래를 영상으로 만든다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했다고 한다. 그는 주인공 베르테르가 느끼는 삶의 모순과 절망을 거친 터치의 일러스트와 ‘노이즈’ 효과로 본문 전체에 걸쳐 표현했다. 만개했지만 결코 아름답다고만 할 수 없는 꽃을 그려 넣은 표지도 ‘질풍노도’의 감정과 좌절을 형상화한다. 사랑의 열병을 앓는 전 세계 젊은이들의 영혼을 울린 괴테의 대표적인 고전을 21세기의 감각으로 표현한 새로운 감성이 돋보인다. |
고도를 기다리며 by 안상수 전통적인 사실주의극에 반기를 든 전후 부조리극의 고전이자 사뮈엘 베케트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고도를 기다리며>는 1985년 국내 최초의 공식 글꼴 ‘안상수체’를 창안하여 타이포그래피계에 혁명을 일으킨 시각디자이너 안상수에게 맡겨져 ‘안상수 식’으로 재해석됐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그 아래에서 대화를 나누는 시골길의 나무 한 그루를 상징하는 직사각형이 간결하게 배치된 표지가 대표적인 예(이 직사각형은 본문 전체에 반복적으로 배치되어 끝없는 기다림, 결코 오지 않는 그 무엇을 향한 갈망이라는 책의 주제를 표현한다). 치밀하고 정교한 표면 처리로 잉크 점착력을 극대화시켜 탁월한 인쇄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최고급 그래픽 인쇄 용지 ‘스타화이트빅스버그(118g)’로 본문을 구성하고, 표지에 실크 인쇄를 함으로써 고급스러움을 한층 더했다.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by 박시영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짝패>, <추격자> 등의 영화 포스터디자이너 박시영의 손길로 다시 태어났다. 먼저 강렬한 일러스트의 표지가 눈길을 사로잡는데, 판화 기법을 이용하여 디자이너가 직접 그린 그림으로서, 스탈린 치하의 노동 수용소라는 폐쇄적이고 절망적인 공간과 지배 권력에 의해 죄 없이 고통 당하는 주인공의 초상을 대비시켜 한 인간의 비극을 형상화했다. 반양장의 표지에 거친 질감의 두꺼운 판화지(아르쉐 벨루어)를 앞뒤로 덧붙여 억압적인 수용소의 느낌을 살렸고, 특히 본문의 페이지 번호를 수용소 벽에 낙서하듯 빗금으로 표현한 시도가 눈에 띈다. |
변신ㆍ시골의사 by 박우혁 <변신ㆍ시골의사>는 작가 카프카가 표현하고자 했던 생의 혼돈을 기하학적인 무늬의 배치와 반복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카프카의 군더더기 없이 명료한 언어, 인간 존재의 불안과 무근저성을 향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상통한다. 책의 표지에서부터 본문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패턴과 활자, 빈 공간, 도형 등은 “이 책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았을 때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입자들”이라는 설명이다. 카프카가 활자를 모으고 연결하여 글이 되도록 ‘변신’시킨 것처럼 디자이너는 검은색의 활자와 금색의 입자, 색색의 도형들을 모아 디자인을 완성했다. |
동물농장 by 박진우 <동물농장>의 디자인은 키치적 감성으로 재해석한 각 동물들의 일러스트가 단연 돋보인다. 페이크 백(fake bag) 등 전작을 통해 소비자본주의사회의 물신주의를 유머러스하게 풍자했던 박진우는, 이번에도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들을 의인화하여 21세기에 돌아본 공산주의에 대한 추억을 아이러니하게도 팝아트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특히 그의 재치는 부록과 같이 책 사이에 준비된 여러 삽지를 통해 발휘되는데, 엽서, 스티커, 딱지, 포스터 등을 끼워 넣어 ‘가지고 놀 수 있는’ 책으로서의 특별한 재미를 더했다. 또한 액자형 케이스를 따로 제작하여 책을 세워 두고 ‘감상하는’ 기능을 추가함으로써 발상의 전환을 보여 준다. |
오만과 편견 by 이돈태 <오만과 편견>은 인물들의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의 흐름을 온도에 따라 변하는 특수 잉크를 사용한 표지로 표현한다. 서모컬러(thermocolor) 또는 시온 잉크라고 불리는 이 특수 잉크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다양한 산업재와 소비재에 널리 쓰이고 있는 안료이다. 차가운 회색빛이었던 표지가 사람의 온기로 따뜻한 분홍색으로 변한다. 이는 점차 사랑에 빠지게 되는 남녀의 관계를 상징한다. 영국 교통안내 시스템과 래미안 아파트 디자인 등으로 유명한 영국 탠저린 디자인사의 공동대표 이돈태는 영국의 서정적인 사랑 이야기인 <오만과 편견이 내포하고 있는 근본적인 ‘관계’를 이렇듯 표현하고 있다. |
구운몽 by 이상봉 패션의 본고장 파리와 뉴욕 등에서 ‘한글 패션’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이 자수 기법을 활용한 표지로 <구운몽>의 한국적인 디자인을 완성했다. 이는 천의 질감을 살린 특수 종이에 도안을 그리고 한 땀 한 땀 수를 놓은 까다로운 공정으로서, 상당히 오랜 제작 기간을 거쳐야 했다(특수 종이가 찢어지지 않는 최적의 땀을 찾아내는 작업부터 선행되었다고 하니 그 어려움이 짐작된다). 구름의 이미지를 통해 인생무상을 표현했다는 이상봉은 미국, 일본, 러시아, 이탈리아 등지에서 7개 국어로 번역 출간된 한국 고전의 정수 <구운몽>을 통해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작품 속에서 탁월하게 구현했다. |
데미안 by 정병규 <데미안>은 197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3000여 종의 책을 디자인한 한국 북디자인계의 개척자이자 선구자인 정병규가 디자인을 맡았다. 민음사 편집부장, 홍성사 주간 등 편집자로서 먼저 책과 인연을 맺은 그는 텍스트를 가장 잘 이해하는 북디자이너로 손꼽힌다. 정병규는 이번 작업을 통해 다양한 기법과 현란한 디자인을 과시하는 대신, 인쇄 기술이 발달하면서 책이 대량 판매되던 시기 이전의 고전적 디자인을 도입함으로써 북디자인의 정수를 느끼게 했다. 마치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보는 듯 담백하게 구성된 디자인이 가히 감동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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