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평화의 섬이다. 제주에서나는 한라산 품에 안겨 느림과 평화를 느낀다. 그런데 실상 제주에는 많은 아픔이 있다. 사실 제주는 섬이라는 특성으로, 그리고 우리나라 중앙부에서 멀다는 이유로 늘 변방으로, 중앙의 문제를 털어내는 공간으로 존재해 온 것 같다. 그 섬에서도 사람이 살고, 그 사람들의 삶은 그 자체로 존재하고 또 소중했을 것이다. 그러나 늘 누군가에 의해 그 섬의 '평화'가 깨어지고, 사람들이 다쳤다. 여러 사건 중 하나가 일본 제국주의 시대 말기 전쟁 중에 일본군이 이 제주 섬을 온통 전쟁터로 만든 것이다. 제주 섬 곳곳에서 지금도 볼 수 있는 그 피지배와 전쟁의 흔적들.. 그러나 사실 나도 제주를 여러 번 갔어도 그저 한라산 그 아름다운 선과 오름, 그리고 바다와 바람, 술 한 잔에 제주 섬에 남겨진 그 상흔을 제대로 보지를 못했다. 미안하다. 지난 달 말 제주 길에서 그런 상흔을 잠깐이라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제주시 한경면 청수리에 있는 가마오름 일본군 땅굴진지 현장에 '가마오름 평화박물관'이 있다. 이번에 그곳을 가 보았다. 이 박물관은 사립박물관이다. 박물관을 설립한이영근 대표이사는부친 이성찬옹(85)이 젊은 시절이었던1942년부터 1945년까지일본군에 징용되어 이 가마오름에 있는 땅굴 안에서 군량미 수송 노역에 시달렸다는 일을 직접 듣고, 이곳에 땅굴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학습장을 만들기로 하고 이 박물관을 만들었다고 한다. 각종 전시품도 확보하고, 영상관도 마련했다. 그리고 전체 길이가 2km나 되는 땅굴진지 중 제1땅굴 300m구간을 복원해서 개방하고 있다.
사실 내가 갔을 때는 아직 본격 관광철도 아니고 해서인지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제주 섬이 가진 상흔을 잊지 않기 위한 설립자의 뜻은 동백보다 더 붉었다. 관람객이 한 사람 뿐이라고 해도 찾은 사람에게 성심껏 설명도 해 주고 하는 것을 보면서, 이 일이 정말 잊을 수 없는, 기억하기 싫지만 잊어서는 안되기에 기억해야 할 시간들을 꼼꼼하게 되짚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알게 해 주었다. 잠시 땅굴에 들어갔다 왔는데, 그 당시 사람들이 느꼈을 고통과 공포가 어땠을 지 짐작하기 어렵다. 밀랍인형은 그 자체로 시간을 정지시켜 두었다. 땅굴을 나와 잘 마련된 길을 따라 가마오름에 올랐다. 아직은 봄이 완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무들은 힘차게 겨우내 준비해 두었던 새 잎을 내 밀고 있었다. 바람도 그리 차지 않아, 시원하다. 오름에 오르니 산림감시를 하는 분이 근무하고 계셨다. 나이가 좀 드셨는데, 굳이 사진을 찍어 주신다고 하신다. 요즘 스스로 사진도 잘 찍지만, 아무래도 사진은 누군가가 찍어주어야 제대로 분위기를 담을 수 있다. 사진기를 들고 있어 나 자신을 찍을 기회가 없었는데, 낯선 관광객 사진을 찍어 주시는 그 분도 혹시 이 오름에서 그 아픈 기억을 가지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감히 여쭐 염치가 없었다. 내려 오려는데, 불러 돌아보니, 감귤 나무에서 바로 따온 것이라며 귤 하나를 건네주신다. 그 단맛이 내가 발로 딛고 선 오름 아래 어두운 동굴에서 흘린 선조들의 눈물을 먹고 자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달게 느끼지도 못했다. 길지 않은 평화박물관 관람.. 여기서는 내 자신이 관람객이어야 하는 것조차 사치라고 생각했다. 차를 타고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가면서 평화는 어디에 있을까? 이 박물관 안에서 나는 아직도 평화를 만나지 못했다. 이 여행길을 끝내고 다시 집에 돌아가면 우리는 여전히 갈등과 대결, 그리고 막무가내의 싸움판.. 이제는 평화를 제대로 꿈꾸기도 어려울 지도 모를 그 현실에서 나는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한다. 정말 뭘 어떻게 해야 우리 모두의 삶이 평화로울 수 있을까? 어두운 동굴 속에서 나는 아직 빛을 보지 못했다. 다만 그 어둠 속에서도 작은 불빛 하나에도 생명을 만들어 내고 있는 작은 풀들에게서 작은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아픈 역사를 되풀이 아지 않기 위해 아픈 시절을 되돌아 보는 박물관 사람들의 용기와 실천 속에서 따스한 차와 같은 향기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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