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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읽기

구한말 개혁파들, 감옥에서도 도서관 만들고 책을 통해 근대 민주국가를 꿈꿨다

며칠 전인 3월 24일, <동아일보> 이소연 기자가 "한성감옥 옥중도서관서... 구한말 개혁파들, 근대 민주국가 꿈꿨다"라는 기사를 올렸다. '단독' 보도라고 한다. 이미 대한제국 시기, 개혁운동에 나섰던 여러 지식인들이 갇혔던 한성감옥서(나중에 서대문감옥 종로구치감)에서 감옥 안에 서적실(도서관)을 만들고 같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근대 민주국가를 꿈꾸었다는 사실은 알려진 이야기다. 그런 중에 이번에 이와 같은 기사를 통해 다시금 주목을 받게 된 건 월남 이상재(1850~1927) 서거 95주기를 맞아 그 후손인 이공규 씨가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한성감옥 도서대출 장부'를 기념관 산하 한국독립운동연구소가 공개한 때문이다. 이 장부는 1903년 1월부터 1904년 8월까지 약 1년 7개월 동안 수감자와 간수의 책 대출내력이 기록된 143쪽 자료로서, 우남이나 월남 등 독립협회 활동으로 투옥된 인사들의 이름도 담겼다고 한다. 장부가 감옥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은 월남과 함게 투옥되었던 차남 이승인이 출옥할 때 가지고 나왔기 때문(<뉴시스> 2022.3.28.)이라고 한다. <동아일보>는 독립기념관이 제공한 도서대출장부를 보여준다. 이번에 공개된 이 도서대출 장부를 통해 앞으로 독립운동 역사에 있어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질 것이라 기대된다. 

1903, 1904년 한성감옥 옥중도서관의 도서대출 장부. 붉은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우남 이승만이 대출한 &lsquo;천로역정&rsquo; 등이고 푸른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월남 이상재가 빌린 &lsquo;태서신사&rsquo; 등이다. 독립기념관&middot;이승만기념관 제공(동아일보 보도에서 가져옴)


이 장부는 앞서 1985년에 고 이광린 교수가 감옥 온건개화파의 기독교 전도 관련 자료라는 관점에서 언론에 소개했고, 이후 이승만과 기독교 관련자료로 일부 연구자들이 주목해 왔다고 한다. (<뉴시스> 기사 참고) 당시 보도에 따르면 이 장부는 세로 26cm, 가로 20.5cm, 130면에 달하는 노트라고 한다.  이 교수는 <백남준 박사 추모 논문집>에 "구한말옥중에서의 기독교신앙"이라는 논문을 싣고 처음 서적실은 외국인 선교사와 목사 등의 노력으로 설치되었고, 책들은 배재학당 교사로 와 있던 벙커 목사와 중국 상해에 거주하던 선교사들이 기증한 기독교 계통의 책이 대부분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동아일보> 1985.5.31. 6면 (일부)


이번에 기사를 접하고 관련 연구 등이 있었나 찾아보니, 이미 몇 건의 연구가 있었다. 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 한성감옥생활(1899-1904)과 옥중잡기 연구>(연세대학교 출판부, 2002)라는 단행본과 함께 2012년 유춘동(연세대학교)의 "한성감옥서의 <옥중도서대출부> 연구"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한국서지학회 <서지학보> 40호에 실린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글은 한성감옥서(漢城監獄署) 서적실(書籍室)의 도서 대출장부였던 <옥중도서대출부(獄中圖書貸出簿)>를 토대로, 대출부의 기재 방식과 특징, 서적실의 운영 실태, 기타 관련 사항 등을 살펴보았다. 먼저, 대출부에 의거하여 당시 한성감옥서와 서적실을 살펴보았다. 서적실의 장서는 최초에 265권의 장서로 시작되었다. 이후 꾸준히 증가하여 1904년 8월말에는 국문책 52종 165권, 한문책 222종 338권으로, 영어책 20종 40권으로, 총 294종 523권을 갖춘 서적실이 되었다. 다음으로 대출부의 기재 방식을 살펴보았다. 크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째는 매일 도서의 출입 상황을 써놓았다. 이때 대출자의 성명, 수감 위치, 책의 국문(國文), 한문(漢文), 영문(英文) 여부, 책의 제목 등이 확인된다. 둘째, 서적실 장서의 결산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서 대출된 책의 총수, 빌려간 사람의 총합, 국문책과 한문책의 대출 비율, 서적실의 평균 이용인원 등이 확인된다. 셋째, 서적실 장서의 미수(未收) 상황표가 확인된다. 국문책과 한문책을 따로 작성했으며, 미납자는 감옥서의 관리들이거나 외부대출자였다. 넷째 영어책의 출입표도 존재했었다. 국문책이나 한문책과는 달리 외부 대출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용자 수도 극히 제한적이었음이 확인된다. 이외 서적실의 운영자, 대출과 관련된 사항, 대출자와 대출책의 경향 등을 살펴보았다. 차후 과제는 서적실의 운영, 대출책의 경향, 대출자들의 면모 등을 좀 더 입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서적실을 이용했던 수감자와 서적실 운영자들의 행보, 『샛별전』과 같이 서적실에서 많이 읽혔던 책에 대한 분석 작업이 요청된다.

여기서 관심을 가는 부분은 1904년 당시 도서관에 있었다는 장서들의 현재이다. 모두 294종 523권의 목록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는데, <동아일보> 보도에서는  당시 장부에 기재된 대출도서 중 가장 많이 대출된 7권도 소개하고 있다. 

45회 대출로 순위 1위에 오른 <유몽천자(牖蒙千字)>(Gale, James Scarth(奇一) 著  李昌植  李昌植 光學書鋪 1904) 국립중앙도서관에서도 실제 원문을 볼 수 있다. (다만 직접 도서관에 가서 봐야 한다). 이 외에도 목록을 확인할 수 있는 294종의 책을 지금도 확인해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도서관 부문에서나 이 기록을 가지게 된 독립기념관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보면 좋겠다. 그런데 이 책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2018년 백시현의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인 <한국 교도소도서관 발전사 연구>(지도교수 김유승)에서도 이 한성감옥서 서적실에 대한 언급이 있다. 지금 현재로서는 서적실이나 서적의 행방은 파악하기 어렵과, 대부분 장서는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을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 한성감옥서 서적실의 장서들은 경성감옥을 거쳐 그대로 서대문형무소로 이관되 었다. 김구는 서대문형무소 내에서 이승만이 설치했던 장서를 읽었다는 회고를 남겼다. 그러나 서적실을 따로 운영했던 것은 아니고, 일정시간이 되면 손수레를 끌고 와서 책 을 나눠주는 식이었다고 한다. 서대문형무소는 지금의 안양교도소로 그 역사가 이 어지는데 이 서적실이나 서적의 행방은 현재 파악하기 어렵고, 대부분의 장서는 6·25 전쟁으로 소실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백시현은 논문에서 이런 주장도 하고 있다.

현재까지 연구된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최초 근대 도서관은 1901년 개관한 부산 도서관의 전신이 되는 ‘홍도구락부’라고 명칭만 남아있는 상태일 뿐, 상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도서관의 기본적인 요건이 갖추어진 상황을 보았을 때, 오히려 이 ‘한성감옥서 서적실’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도서관이면서 최초의 교도소도서관이라고 지정할 수 있다고 본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근대 도서관의 시작을 어느 곳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들이 있다. 그런데 이처럼 한성감옥서 도서관을 우리나라 최초 근대 도서관이면서 교소도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다는 이 지적에 대해서 이후 어떤 추가적인 논의가 있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 계속적인 논의가 있었어도 좋았겠다 싶다.